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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의 현상황

이슬람 상황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이슬람 상황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알렉산더 J. 말리크/노종해 역


역자주)-Dr Alexander J. Malik의 “Confessing Christ in the Islam Context”를 번역하습니다. Dr Alexander J. Malik(1944.10.1.)는 파키스탄 앵글리칸 교회(성공회)의 명예감독(Emeritus Bishop of the Lahore Diocese of the Church of Pakistan)으로,  라호르 교구 주교로 32년간(1980-2012) 봉직한 분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더 J. 말리크 감독과 파키스탄 라호르 교회


     그리스도 고백은 상황에 따라 방법, 표현이 다르다. 마태는 그의 복음을 유대인을 위한 복음으로 유대인 개념론(Jewish Terminology)을 사용하였고, 요한은 헬라적 유대인을 (Hellenishtic Jews) 위하여 기록하였다. 그래서 동일한 그리스도(Christ)를 고백하면서 다른 상황에서는 희랍 개념(Greek Terminology)을 많이 사용하여, “말씀(Logos)", "생명(Life)", "빛(Light)" 등 희랍철학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바울사도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다“고 같은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동일한 그리스도는 이슬람(Islamic), 힌두(Hindu), 불교도(Buddhist) 혹은 막스주의자(Marxist) 상황에서도 다른 표현으로 고백될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 고백’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특히 파키스탄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부분에서는 ‘이슬람적 상황에서 그리스도 고백‘에 대해 다루고, 둘째 부분은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 고백의 특성”을 다루려 한다.



*파키스탄 종교인구 비율표-무슬림 96.7%, 기독교인 1.6%, 힌두1.3%, 기타0.4%


I. Section one: 이슬람적 상황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최소한 세 가지 기본적 상황에 직면케 되는데 첫째는 꾸란의 기독론 이고, 둘째는 기독교 성서의 권위와 확실성이며, 셋째는 점차적으로 이슬람 선지자(Prophet of Islam)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무슬림”(Muslim Christ)으로 전향된다는 점이다. 즉 “무하마드론”(Muhamadology)에 반하여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교리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세 가지 면은 우리가 이슬람 상황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Lord)와 하나님(God), 구주(Saviour)로 고백할 수 있는가?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알 수 없는 인간(Person)이 아니다. 그는 무슬림의 경전인 꾸란(Quran)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다. 꾸란도 성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점에서 힌두교(Hindu)와 불교(Buddhist), 유교(Confucian)의 경전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는 꾸란에 93번 진술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고지(Annunciation)와 탄생에 대해서도 긴 문장으로 수라(Surah: 꾸란의 장)에 기록되어 있다. 꾸란에 기록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예수에 대해 아름다운 이름과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아들”(Ibni-Maryam, Son of Mary), “메시아”(Al-Masih, The Messiah), “선지자”(Rasul), 사도, “하나님의 말씀”(Kalimat-Ullah,), “하나님의 영”(Ruh-Kallimat-Ullah, The Spirit of God) 등이다.3) 수라(Surah)에는 예수의 교훈(Teaching)과 사역(Works),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마지막 승천에 대한 기록은 있다.4) 이러한 내용이 꾸란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 표면적으로는 신약성서의 기독론과 유사하게 보인다.


*파키스탄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크리스챤들


     그러나 좀더 면밀히 보면 꾸란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기독론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인격적으로도 참 인간임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사역을 예언자(prophet)와 제사장(priest), 왕(king), 세 가지 방면으로 표현하며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런 면에 대해 아무 기록이 없다. 이러한 진리는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꾸란은 예수에 대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꾸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들 됨(Sonship)도 부인하고 있다. 그는 아담처럼 피조물에 불과하다.


“진실로, 예수는 신편에서 보면 아담에 불과하다. 그는 흙으로 지었고, 그 후 ‘있으라’하니 그가 있었다.”(Surah 3:5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이단자 보다 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크리스챤(Christian)은 메시아가 신(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신이 그들과 다투는가! 어떻게 그들이 누울 수 있는가!.”(Surah 9:30)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피조물일 뿐이고 신성도 없고, 세상을 섭리하는 신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벌을 막지 못하리니 그분의 뜻이라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되느니라.”(Surah 5:19)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그도 사람들과 같은 일반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수는 한 종에 불과하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교훈이 되게 하셨도다.”(Surah 43:59)

그리스도의 아들 됨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자손이 있다고 불결한 말을 했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자손을 가질 필요가 없으시매 천지의 모든 것이 종으로써 하나님께로 오기 때문이다.(Surah 19:91-93)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라. 그 분은 자손도 없으며 그 분의 왕국에서 동반자도 없느니라. 그 분은 또한 보호자도 필요치 아니 하시니 그 분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미하라“(Surah 17:112) 

 

     꾸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특별한 이름과 존경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존엄(dignity), 죄 없으심(sinlessness), 그의 권능(power), 기적(miracles) 등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다른 예언자들과 본성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선재(pre-existence)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교훈과 활동에 대해 주시해 보면 화육적 개념(incarnational notion)에 대해서는 꾸란도, 무슬림도 질색하고 있으며,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부인한다.5) 그리스도의 대속사업(atoning work)도 꾸란에는 언급이 없다. 그는 단지 멧신저(a messenger)이며, 멧세지 전달자(a message bearer)일 뿐이다. 그는 복음(Injil)을 주었으나 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부패되어 버렸다.6) 그러므로 그의 인격, 사업, 교훈이 하찮게 쇠퇴되었고, 꾸란에 나오는 많은 예언자들과 다를 바 없도록 퇴락 되었다. 이러한 점을 지적해 주는 “우리도 그들(예언자)과 다를 바 없다”(Surah 2:130. 285)는 꾸란 문구도 있다.


“가로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을 보내었도다. 또한 모세와 예수, 예언자들도 보내 주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거리가 없다.”(Surah 3:78)


     예수는 다른 모든 예언자들이 죄 없는 것처럼 죄 없으시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행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다른 예언자 보다 그의 초월적인 위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가 온 목적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며, 주요 역할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전조(前兆, fore-runner)일 뿐이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 실로 나는 너희에게 보내어진 선지자로써 내 앞에 온 구약과 내 후에 올 아흐맏(Ahmed)이란 이름을 가진 한 선지자의 복음을 확증하느니라.“(Surah 61:6)7)


     꾸란에서 직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부정에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고백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는 성경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으로 성격의 말씀대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은 기독교 성서가 부패되고 폐기된 것이라고 말하며 편리한 대로 선택하도록 내버려둔다. 꾸란 조차도 모든 무슬림들에게 전에 나타난 성서로 믿도록 했다고 하나, 즉 모세오경(Tawrat, Torah)과 시편(Zabur, Psams), 복음서(Injil, Gospel)8) 등이나, 기독교 성서는 부패되었고 신뢰할 수 없다고 무슬림들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 현대 무슬림 학자들은 성경과 서방의 인식과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둘째 선택은 무슬림에게 꾸란에 근거하여 그들의 개념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꾸란을 참고하고, 기독교 견해를 무슬림 개념으로 표현토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꾸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에 대해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기독론”에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기독교 변증론도 전부 이러한 자료문서를 힘입고 있다. 판더(Pfander), 베반-죤스(Bevan-Jones), 비지훨드(W. Bijifeld) 등과 같은 학자들은 기독교 관점에서 꾸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와 변증은 오래가지도 못하며, 무슬림 묘사처럼 나쁘지 않다고 해도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확신도 주지 못한다. 이는 그리스도 고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현실 상황은 아무 변화도 없다.


셋째 난점은 무슬림들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기독교 기독론(Christology)의 근본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divine)” 성품을 지닌 경건한 인간으로 이슬람 예언자로써 존경할 이름일 뿐이라 한다. 이는 파키스탄 이슬람에서 일반적인 진리이다. 무하마드의 말씀이 창조적인 권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분은 왕이나 주(Lord) 보다 높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은 순종해야 한다. 그의 나라는 온 세상 우주이며, 천국은 물론 지상도 그의 나라이다. 그의 이름은 후리(Huris)의 눈으로 보아도 만물에 낙원(Paradise)이라 기록되어 있다. 무하마드 이름에는 고통과 시련의 사람들이 받을 놀라운 권능(Power)을 지니고 있다. 예언자를 숭배하는 새로운 영향은 꾸란(Qur'an) 만이 아니라 하디스(Hadith)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꾸란은 무하마드의 초자연적인 권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초기 자서전에는 그도 인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무하마드를 기독교 교리의 그리스도 인격과 비교하여 볼 때 이슬람과 기독교의 두 가지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결과는 유사하게 보인다. 이슬람은 상승운동(upward movement)이고, 기독교는 하강운동(downward movement)이다. 이슬람에서 예언자 무하마드는 높임 받고,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서 그 자신이 겸손히 자기를 비워 내려온 분이다. 이슬람에서 인간은 “신”(divine)에게 복종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이슬람에서 인간은 직접대면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중보자(mediator)이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되어 중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고백은 “꾸란적 기독론으로 격하시키는 자”일 뿐만 아니라 무슬림은 예언자 무하마드에서 그들 자신의 “그리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간절히 기도하는 파키스탄의 크리스챤들



II. Section Two: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 고백의 특성


     이슬람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기독론을 이슬람 종교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독론이 이미 발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기독론“(Christology)이 발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상호 배타적인(exclusive) 자세가 아니라 존중(inclusive)하는 입장에서 임은 물론이다.


     아주 단순한 개념은 무슬림들이 인식하고 있는 개념과 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 of Christ),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death of Christ on the Cross) 등 이다. 왜 그리스도에 대해 논쟁하는가? 하나님이 중요하지.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하마드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자,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도덕과 윤리, 법도를 따라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모든 종교의 결과는 고상하고 예의 있게 사는 삶이다. 물론 이런 생각에는 구세주(Saviour)가 소용없고, 구원(Salvation)은 의로운 삶이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가?


     둘째 개념은 성서적 기독론을 재개발하는 것이 요긴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성서적 그리스도(biblical Christ)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조(creeds)의 대부분은 세기를 거치며 그의 인격에 대한 논쟁의 결과이다. 어떤 면에서는 진실한 그리스도가 희랍철학의 개념과 표현으로 숨겨졌고, 이러한 개념과 표현으로 가려진 그리스도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real Christ)를 찾기 위해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만 한다. 신약성서의 최초 저술가들은 히브리 사상을 희랍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희랍 교부 혹은 라틴 교부, 동방이나 서방 기독론 보다 성서를 근거한 기독론이 중요하다. 교부들이 쓸데없는 논쟁을 일으켰고,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성서의 그리스도를 찾자는 것은 이슬람 종교, 사회, 문화 사상의 개념으로도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사회-문화 사상개념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중심 사상은 유일성, 즉 “따우히드”(Tawihid, Unity)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Allah-O-Akbar, Greatness of God)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슬람 상황에서의 그리스도 고백은 하나님의 유일성(Unity)과 위대하심(Greatness)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크리스챤은 무슬림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곁의 또 다른 하나님으로 고백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다른 신과 연합시키는 죄, 쉬르끄(Shirk)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성경말씀에도 이러한 신앙이 기록되어 있다.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에도 “나는 한분 하나님을 믿습니다”로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것을 무슬림에게 보일 수 있는가? 무슬림은 꾸란에 계시된 하나님을 주시한다. 현상학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꾸란은 하나님과 신성의 “계시”(revelations)로  수 있다. 즉 한분은 “인격”(personal)이고 다른 하나는 "구두"(verbal)이다. 하나는 무슬림 신학(Kalam, Theology)에서 하나님과 보존된 판(Loho Mahfooz, preserved tablet)의 영원한 “관계성”(relationship)으로, 또한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성(eternal sonship)으로 관심 있는 유형을 찾을 수 있다.

 

     꾸란이 보존된 판(Loho Mahfooz)으로 “계시” 되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한 판이며, 하나님 ”안에“ 혹은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가?. 그러면 영원한 분이 둘, 즉 하나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보존된 판인가?. 물론 무슬림은 엄격한 단일신론 자들(monotheists)로 두 가지의 영원성을 믿을 수 없다. 둘째 가능성은 하나님 안에“(in)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in)에 있다면 하나님 ‘안에”에 “인격성”(personal) 계시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신성인 것이 된다.


*극단적 무슬림들의 박해에도 굽힘 없는 파키스란의 크리스챤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와 신성(divine)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막을 이렇게 말하였다. 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이다. 하나님 “안에”(in)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이 화육한(God incarnate), 그래서 신성(divine)인-인간 형(human form)을 지닌 것이다.


기독론의 다른 면은 그리스도의 “독생자“론(Sonship)이다.


     이러한 고백에서 무슬림은 크리스챤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의 아내로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쉬르끄(Shirk)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하나, 이는 크리스챤들이 믿는 정확한 신앙이 아니다. 크리스챤들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내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신 곁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러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내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여기서 크리스챤들도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고백은 ”아들“이란 물리적인 ”세대(generation)"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르두(Urdu)와 아랍어(Arabic Languages)에서도 “아들”(Son)이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역시 물리적인 “세대”란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사자의 아들”(Sher Ka Baccha, son of a lion), 또는 "시대의 아들“(Ibn-ul-waqat, son of time) 등이다. ”사자의 아들"이나 ”시대의 아들“은 사자나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권 파키스탄에서 사용하는 ”따우히드의 아들“(Farzandan-e Tawid, son of Tawhid)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구이다. 이 따우히드(Tawhid)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뜻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들‘(Son)이란 물리적 인식에서 “세대”란 뜻이 아니란 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꾸란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가? 나는 사적으로 무슬림들에게 고타마 붇다(Gotama Buddha) 이야기를 해준다. 고타마 붇다는 그의 왕좌를 떠나 벤얀(banyan, 보리수) 나무 밑에서 명상키 위해 정글로 갔다. 지금도 숲 속 벤얀나무 아래의 붇다를 보고 스승(sadhu)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왕이었다. 그는 왕족이며 왕의 혈통을 이어 받은 분이다.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6-7)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을 때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 좋은 말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그는 인간으로 하나님이시며 신이시다. "하나님 이외 신은 없다“ La-illaha-illa-Allah(There is no God but God).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그 이외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하나님의 화육-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유일성(Unitey, Tawhid, Wahdat)을 거절한 것이 이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자신과 세상을 화해하신 것이다“.

 

둘째 이슬람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위대함이다.(Allah-O-Akhbar, Greatest of God)


     하나님의 위대함은 피조물 속에 계시 되었고, 특히 하나님은 피조물 중의 피조물로 인간을 지으셨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피조 되었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인간 속의 영성(divine)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신적인 접촉성(divine spark)이다. 무슬림에서 이러한 바른 관계는 율법(Shariah, Law)에 순종함으로 지켜진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원죄론(doctrine of 'original sin')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율법(Shariah, Law)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의 비참함을 믿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Shariah, Law) 준행의 좌절과 은혜의 필요-이러한 문제에 대해 로마서에서 토론하고 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율법(Shariah, Law)으로 강팍해진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함“(Greatest)은 인간이 새롭게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위대하시기(Allah-O-Akhbar)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되고 거듭나며, 회복되는데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새로운 제2의 창조를 이루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꾸란에서도 아담과 비교되고 있다.(Surah 3:45). 아담과 그리스도는 창조의 두 질서, 즉 첫째 창조와 둘째 창조를 대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담은 첫째 창조 또는 옛 창조에 속해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창조 또는 새로운 창조에 속해 있다. 우리는 아담을 첫째 아담이라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 부른다. 실제로 신약성서는 둘째 또는 새로운 아담, 즉 그리스도란 칭호를 사용하나 꾸란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한 칭호로 사용치 않는다.


첫째 아담은 흙으로 지으셨으며 하나님 창조의 말씀은 흙에 역사하였다.(Surah 3:9).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다.(창2:7). 둘째 아담은(예수 그리스도) 마리아를 통해 말씀으로 지으셨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흙에 역사하였고,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의 인간(person)으로 “인간 육체“(human flesh)에 임하였다. 즉 메시아, 예수, 마리아의 아들은 단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느니라“(Surah 4:169).12) 신약성서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14)라 했다. 이는 첫째 아담은 흙에서 왔고, 둘째 아담은(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으로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생명을 주는 영(the life-giving Spirit)이 되었다. 예수는 ”나는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가지고 왔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숨을 불어 넣으면 하나님의 허락으로 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나는 장님과 문둥이를 낫게 하며 하님의 허락이 있을 때 죽은 자를 살게 하며“라 했다.(Surah 3:43)13)


     꾸란에 따르면 첫째 아담은 선지자였고, 둘째 아담(예수 그리스도)도 선지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Spirit)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옛 또는 첫 창조를 대치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창조의 두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우리의 자연적 출생이고, 둘째는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우리가 새롭게, 거듭난 것이라 했다. 예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3,6)라 말씀하였다.

 

     사도 요한은 거듭 말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다.(요1:12-13). 크리스챤들은 무슬림 형제들에게 율법, 샤리아(Shariah, Law)를 순종치 못한 “타락한” 사람들을 성령(Holy Spirit)의 권능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Allah-O-Akbhar, God is great)을 바르게 증거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성”(The Greatness of God)은 무슬림들에 의해 부인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도 지켜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전능하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본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종, 그리스도를 수치스런 죽음으로 죽도록 둘 수 있는가? 꾸란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는 것도 그렇게 거리 먼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고백에서 이슬람 사상의 유형을 따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꾸란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선지자들이 고난 받아 왔다고 진술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불신앙적인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들-유대인들에 의해 고난 받으셨다. 그리고 십자가로 넘겨질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그리스도) 도망하지 않았고, 차라리 죽음에 직면해서도 하나님께 복종(Islama. Islam)하였다. 신약성서에는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5이하)라 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를 구출할 수 없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를 부할 하도록 하신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허락하셨다. 인간도 누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 바로 그 그리스도를 살리셔서 그의 “위대함”을 보인 것이다.


*파키스탄의 개신교 교회에서 부활주일 예배 드리는 크리스챤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무효화 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정복하신 “위대함“을 나타내신 것이다. 신약성서 말씀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었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무슬림 친구와 토론하는 동안 필자는 그 친구로부터 아름다운 문구를 듣고 감동 받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사망이다“.(Masih ki maut, maut ki maut hai, Christ's death is the death of death).


     넷째 개념은 성서적 그리스도, 즉 임마누엘(Emmanuel),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이다. 신-인은 희랍인들(철학자들)에게 어리석은 것이며 무슬림들에게는 장애가 된다. 그러나 그의 부활의 권능으로 그는 우리의 구세주(Saviour)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인간이 되신 것에 하나님의 “위대함”(greatness)이 있다. 이는 믿는 자의 생명도 부활(resurrected lives of the believers)시키는 능력이다. 한편으론 성서적 기독론의 본질이 난처하게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한다.


     오늘날 이슬람적 세계는 율법, 샤리아(Shariah)의 재 발흥을 강조하나 기독론은 실제적인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 주 하나님이요,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러한 고백은 교회의 설교(Kerygma)와 친교(Koinonia), 증인(Martyria), 봉사(Diakonia)로 표현 되어야 한다.(rch)


*파키스탄 무슬림들


*파키스탄 무슬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