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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사 사론

“이웃사랑”(愛隣)의 목회, 사회사업의 선구자

“이웃사랑”(愛隣)의 목회, 사회사업의 선구자
-정지강 목사의 생애와 사회복음 활동을 중심으로-

 

 노 종 해(CM리서치)

 

*방송설교하는 정지강 목사

 

신앙의 선조-토마스 목사 순교자의 증인 자손

 

    정지강(鄭志强) 목사는 1900년6월21일 평양에서 정기용(鄭基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정목사 가정은 한국 초대교회의 교인으로 순교자의 피로 믿음을 갖게 된 가정이다. 조부 정의조(鄭義祖)는 진사(進士)급에 있던 관리로 한국선교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분이시다. 특히 평양 대동강 변에서 성경을 반포하다 순교한 토마스(Rev, J.T Thomas) 선교사의 순교현장을 친구 최치량(崔致良)과 목격하고 충격을 받고, 던져진 성경책을 숨어서 읽으며 예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던 중, 평양에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 왔을 때 최초로 설립된 장로교회인 “널다리교회”(章臺峴敎會,1894)에 첫 교인이 되신 분으로 토마스 목사 순교의 증인이었다.


어린 시절 믿음의 가정 성장

 

    정지강 목사는 아버지 보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어려서부터 갖고 장대현교회에 다녔다. 목사가 된 것도 할아버지가 손자보고 목사 되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1)

 

   정지강의 아버지 정기용 씨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만주로 가셨고, 독립군 자금 조달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 후 어디에 계신지, 살아계신 지도 알지 못한다 했다.

 

    정지강 목사는 할아버지의 신앙적 감화 밑에서 그다지 부족함 없는 생활 속에 성장하였다. 설교시간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주일예배 참석하고,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던 철저한 신앙훈련을 회상키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주일날이면 밖에 나가 놀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집 안에서 지금처럼 딱 총을 가지고 노는 것은 어림도 없는 때였습니다. 할아버지 옆에서 찬송을 불러 드리고 성경을 읽어 드리며 같이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때는 요즘처럼 유치부와 유년부가 있어 따로 예배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장년예배 시에 같이 앞자리에 꿇어앉아서 예배를 보았습니다.”2)


평양 교육과 목회시작

 

    정지강은 1919년 평양숭실중학교(平壤崇實中學校)와 1921년 평양사범학교(平壤師範學校)를 졸업하신 후 평북(平北) 강서 사달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직(校長職)까지 맡아 교육활동 하였다. 이 학교는 평양지역을 개척한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Rev, Moore) 목사가 설립한 미션스쿨 이었다. 정지강은 강서에서 교사로 교장으로 일할 때 이경심 선생과 결혼하였다.

 

     이경심 선생은 평양 숭의여고(平壤崇義女高)를 나오신 분으로 3.1운동 때 기숙사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배포하며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분이였다.3)  정지강은 문요한 선교사와 의논하여 29세 때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여,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시면서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하였다.4) 그는 신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면서도 교회를 열심히 도와 일하였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주보”를 발행했다고 한다.5)

 

    정지강은 평양신학교를 다니며 1930년부터는 장로교 장대현교회와 쌍벽을 이루는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전도사로 임명받아 1933년 일본 유학 떠날 때까지 첫 담임목회(1930-1933)를 하셨다.6)

 

▲ 平壤 南山峴敎會(1930-1933)
▲新陽里敎會 담임(1934-1939)하며 "애린원"; 창립


평양 애린원 설립-사회복음운동 영향 받아

 

▲ “社會事 業平壤愛隣院(본관) 창립
▲ “社會事 業平壤愛隣院 창립기념 영화, 음악회(935.7.18)

 

    정지강은 1933년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 신학부(靑山學院 神學部)에 입학하여 감리교신학을 공부하였다.(1933-34) 목사님은 장로교 신학교와 감리교 신학교에서 신학공부 하신 것을 설교시간에 그 이유를 말씀하였다. 즉,

 

    “오늘 우리나라 형편을 보세요! 지방색, 지방관념! 왜 이렇게도 강합니까? 더욱이 기독교 안에서 말입니다. 교회 이름을 지어도 이북교회, 관북교회, 평양교회 등등! 나는 33년 전 평양 장로교신학 정통파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감리교신학을 한 후 들어와서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치는 운동을 했습니다.”7)
   

▲ <社會事業;愛隣; 創刊號 第一號(昭和13年 7月18日)
▲ 第二號(昭和14年 1月16日)
▲"愛隣"; 創刊號 目次, 第一號(昭和13年 7月18日)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신학공부하며, 특히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선생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로서 복음전도와 사회사업을 병행하는 사회복음주의운동(社會福音主義運動)을 결심하였다. 정지강은 “자신의 전 생애를 바꾸게 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졸업 후 즉시 귀국하여, 평양 신양리교회(平壤 新陽里交會)로 파송 받아 담임하며(1934-1939), 한국인으론 최초 사회사업 기관인 “평양애린원”(平壤愛隣院)을 1935년(召和十年)7월18일 창립하고,8) 최초 사회사업지(社會事業誌)인 “애린”(愛隣) 2호까지 발행(1938-1939년)하여 사회사업 분야의 한국기독교 사회사업의 개척자요, 선구자가 되었다.9)

 

▲ 平壤愛隣託兒所(新陽里175-27)
▲ 無料託兒所 遊戱室 內部(애린 제2호 사진)

     “애린”이란 뜻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빈민구제와 무료탁아소, 육아원, 맹아학교, 거지학교, 거지 기숙사, 부녀기숙사 드을 돌보는 사화사업 기관이었다. 정지강 목사는 “사회사업시설 애린원에 수용된 고아, 거지 아이들의 구호를 위한 비용을 보태는 동시에 그 아이들에서 수선 개수하는 기술을 습득 시켜 자립케 하는 수산원(授産院 )을 설립”하였다. 손수 수례를 끌고 폐품을 수집하여 수선 재생하여 판매한 이익금으로 애린원 재정을 확보키도 했다.

 

▲ 愛隣;수산원(1935.10.18.)
▲ 愛隣;"인쇄소"

 

     정지강 목사는 “애린원” 창립 취지서에서, 예수님은 십계명을 첫째 애신(愛神), 둘째 애린(愛隣)으로  새 계명을 주셨다고 했다.(마22:34-40) 그 후에 상애(相愛)를 제자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셨고, 바울사도는 신앙(信仰)과 희망(希望)과 애(愛중), 이 세 가지는 항상(恒常) 있을 것인데 그 중(中)에 제일(第一)은 애(愛)라고 말씀하였다.(고전13:13) 정지강 목사님은 에수님의 새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현키 위해 “종교적시설(宗敎的施設)인 사회사업을 하려고 분기(奮起)한 것이 기독교조선감리회(基督敎朝鮮監理會) 평양애린원(平壤愛隣院) 설립의 운동이다”고 했다.

 

▲ 빈민들에 구제품 전달(1937.12.27.)
▲ 愛隣院 無料託兒所 音樂會(2,000여명 참석)

    애린원(愛隣院)에는 전도부(傳道部), 교육부(敎育部), 고학부(苦學部), 조사부(調査部) 구제부(救濟部), 선전부(宣傳部), 인쇄부(印刷部), 작업부(作業部), 수산부(授産部), 판매부(販賣部), 소개부(紹介部), 보건부(保健部) 등의 여러 부서를 두어, “위대(偉大)한 이상(理想)으로 하고 협동봉공(協同奉公)으로서 사회(社會)에 복지(福祉)를 일우려 함에 있다”고 했다.10)

 
시련과 고난의 해방과 6.25전쟁, 피난 시절

 

    정지강 목사는 1941년 선교부로부터 맹아학교를 인수받아 교장으로 해방되던 해까지 수고하였으나, 애린원은 일제말기 많은 시련과 수난을 격었으며, 1947년까지 공산군의 평양진주로 결국 중단되고 월남하였다.11) 월남 후 6.25전쟁을 격으며, 1.4후퇴 때 제주도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피난 중에 “중앙신학교 제주 분교장(分敎長)”을 맡기도 했다.12)

 

    그러나 1954년 미국으로부터 사월 선교사를 통해 무어 선교사의 간곡한 목회를 권유하는 편지를 받고 복음전도자의 길에서 벗어난 것을 눈물로 통회(痛悔)하고, 즉시 부산 서면(西面)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서면감리교회”를 개척하여 다시 목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61년에는 부산 “범일동 감리교회“로 임명 파송 받아 1964년 까지 목회하시다가, 1965년 서울 “충신교회“로 파송 받으셨다.13) 부산에서 목회하시는 동안에도 “부산성경학교” 교장직도 맡으셨고, “부산신학대학교”(釜山神學大學校)에서 교회사(敎會史)를 강의하기도 하였다.14)
 

정지강 목사의 가정과 은퇴

 

    정지강 목사의 가정에 대해서는 그의 막내딸인 정선복 장로가 증언해 주었다. 정지강 목사는 이경심 선생과 강서의 학교 교장으로 재직 때 만나 결혼하였고, 1남2녀를 두었다. 아들은 6.25때 몸이 약해 세상 떠났고, 장녀도 결혼하여 4남매를 두고 폐가 약해 세상을 떠났다. 둘째딸 정선복 만이 충신교회 목사 시절(1965-1971) 가정과 교회를 도왔다.

 

▲동대문의 충신교회(1965-1971,종로 충신동-현, 서초동으로 이전)

    정선복 장로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는 남만주고 가정도 돌보지 않아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다”고 말하며, “목사님은 교회에서 생활비 받으면 고학생들 나눠주고, 양말도 다 나눠주고, 어머니에게는 돈을 맡기지 않아 고생만이 하셨다고, 때로는 신문 값을 받으러 왔어도 신문 값도 없을 정도였다고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술회 하였다. 그러면 서도 목사님은 가방 메고 다니시며 버스타면 차장에게 껌 하나라도 주어야 맘이 놓이시는 분이라 가족에게는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정선복 장로는 “어머니는 그래도 아무 말 없으셨으며, 비단 옷 입어 보지도 못하시고, 검소하며 절약하며 사셨다”고 하면서, “우리 엄마는 무조건 순종하며 사였다”고 증언하였다.

 

    이경심 사모님은 평양 숭의여고를 졸업하시고, 강서의 학교에서 교사하는 중 정지강 목사와 만나 결혼하였으며, 맏딸 정선옥, 둘째딸 정선복, 막내아들 정선일 등 1남2녀를 두엇다. 정선옥과 정선일은 먼저 세상 떠났고, 정선복만 부모님과 살며 교회를 도왔다. 정선복은 성가대원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15)

 

▲ 서울 충신감리교회 정지강 목사 71세 생일기념(1970.6.21.음)

    정지강 목사님은 1971년3월 동대문교회에서 열린 동부연회에서 은퇴하셨으며,  은퇴석상에서 은퇴소감을 피력하셨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고, 고난의 시대인 압박과 전쟁 속에서도 죽지 않고 정년까지 일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한다. 둘째는 더 일할 맘이 있으나 이렇게 규칙상 퇴직이란 데에는 불만이 있다고, 아울러 젊은 교역자 못지않게 늙은 교역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늙어 갈수록 설교를 더 잘하고 젊은이들로부터 환영을 받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였다.16)

 

   정지강 목사님은 1989년, 89세로 별세하셨으며, “애린”(愛隣)의 삶“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었다. 목사님의 사랑목회와 사회사업, 사회복지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그의 따듯한 영향은 오늘날도 ”강남대학“ 등 사회복지로 이어지고 있다.(rch)

 

*(참조)-일제강점기 한국의 빈민생활에 대해서는 강만길 교수의 연구서를 참조!

-강만길:일제시대貧民生活史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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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제태, “토마스의 후예는 말한다”, in 정지강,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서울, 고향서원 1982. 258-260쪽.
2. 정지강, “예배의 정신과 태도”, in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앞의 책 159쪽.
3. 정선복 장로의 증언, 2004년9월12일 대림교회 목회실에서 필자에게 증언하심. 정선복 장로는 정지강 목사의 막내 딸로 평양 애린원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도운 딸이었다.
4. 基督敎朝鮮監理會 第7回(東部.中部.西部) 年會錄. 召和十四年,5.3-10. 159쪽
5. 김제태, 위의 글, 265쪽. 평양 신양리감리교회 부담임 전도사 시절 등사기로 “주보”를 발행하여 전국에서 처음이라 했다.
6. 서부연회 정지강목사 경력 참조. 평양 남산현교회(1930-1933), 동경유학(1933-1934), 신양리(1934-1939), 애린원(1939-)이라 했다. 基督敎朝鮮監理會 第7回(東部.中部.西部)年會錄, 召和十四年,5.3-10. 42쪽.
7. 정지강, “성령의 충만 함을 받고”, 앞의 책 186쪽. 청산학원 동기들 중에는 김정준, 조선출, 안희국, 신사훈, 홍을수, 전성전, 권수기 목사 등이다. 270쪽.
8. 애린원 이사회는 문요한 선교사, 서위렴 선교사, 오기선, 이윤영, 엔더슨 부인으로 구성되어 발기인으로 창립했다. 김제태, 위의 책 273쪽.
9. 윤춘병은 “<愛隣>지의 창간으로 사회사업에 전문잡지를 발행하는 데서도 선구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尹春炳, 韓國基督敎 新聞.雜誌.百年史 , 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84. 263쪽.
10. 정지강,“愛隣院創立趣旨書”, 愛隣, 創刊號, 平壤愛隣院, 召和十三年七月十八日. 15-17쪽
11. 김제태, 위의 글, 274쪽. 끝까지 애린원을 돕고 협조한 이들은 문요한 선교사 외에도 문선호, 박대선, 유동진, 이규선, 장기덕, 유경심, 강신도, 김장애, 이화자, 유인환, 나면길, 김일선 등이었다.
12. 1950년 12월, 6.25 전쟁 중에도 중앙신학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서도 학교를 개설하였고, 1951년 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참조, 강남대학교 우원 기념사업회. 자료.
13. 노종해: 충신교회50년사, 충신교회역사편찬위원회, 2005. 114쪽
14. 김제태, 위의 글, 288쪽.
15. 정선복 장로의 증언. 2004.9.12. 대림교회 목회실에서 필자와 대담에서 증언하였음. 언니 정선옥은 정의여고를 졸업하고 동경 유학하였으며, 동생 정선일은 연세대를 졸업하였고, 정선복은 이화여전을 졸업하였다.
16. 김제태, 위의 글, 291쪽. “정지강 목사님이 제일 싫어하는 말 셋은 늙었다, 죽는다, 할 수 없다. 좋아하는 말 셋은 젊었다, 영원히 산다, 할 수 있다”라 했다.

 

*호암 호숫가 숲 그늘 길(2022.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