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G. 아펜젤러, 그는 누구인가!
“자,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 그 나라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
노 종 해(CM리서치)

올해는(2025년)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인천 항에 도착(1885.4.5.)한 140주년 되는 해이다.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으며, 아펜젤러의 인간과 선교, 헌신, 희생의 삶을 밝히려 한다.
H.G. 아펜젤러 선교사, 그는 누구인가!
서구열강들의 침략적인 흉악한 발걸음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뒤흔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복음의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한국민족을 구원할 복음의 때를 기다려 오셨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일꾼을 택하셔서 한국 땅에 파송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한국 첫 개신교 선교사로서 복음의 발걸음을 옮긴 분이 바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한국기독교를 개척케 하신 아펜젤러는 어떤 사람인가?
(필자 주: 아래 사진들은, H.G. 아펜젤러 선교사가 촬영한 1890년 대 사진들이다.)

첫째, 아펜젤러는 근면하게 일하며, 자신의 맡은 일에 감사할 줄 아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펜젤러는 훌륭한 가문이나 고관, 부유한 상업가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평범한 농부,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스위스 독일계 사람들로서 독일과 국경지대에 있는 스위스 아펜젤러 마을의 근면하고 성실한 강직한 농민들이다. 현재도 이 도시는 자치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1735년 아펜젤러의 선조들은 독일계 미국인들의 지역인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했고 슈더튼(Shoudenton) 지역의 농토를 허락받아 일구었고, 헨리 아펜젤러도 바로 이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펜젤러는 충실한 신앙인으로 양육받아 성경공부와 교리문답을 교육받았고 부모를 도와 근면하게 일하였다. 그는 마구(馬具) 갈기, 목초 베기, 포도 밟기 등을 일하였고 말을 타고 심부름도 잘하였다. 하늘과 땅, 새와 동물들 그리고 다양한 자연의 모습에서 풍부한 인간성을 함양하고, 또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아펜젤러의 자립(自立), 자조(自助), 근로(勤勞)의 정신과 삶은 그가 초기 한국선교사로 왔을 때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기반이 되었고, 배재학당 학생들과 교인들에게도 자립, 자주, 근로의 생활을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산업부를 두어 기술을 가르쳤으며, 인쇄소를 설치하여 학생들로 근로하게 하여 학비를 벌어 자립하도록 훈련시켰다. 바로 이 인쇄소에서 <협성회보>, <독립신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뿐 아니라 영문잡지 <The Korea Review>, <The Korean Repository> 등을 발간하여 인쇄문화와 언론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 아펜젤러는 선교의 열정이 불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1876년 10월 1일 죄의 용서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였고, 그 후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서 기도회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대학시절 평신도 전도자로 설교자의 자격을(Lay-Preacher) 받았으며 1882년 대학을 졸업한 후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복음전도와 설교에 힘썼다. 또 몬트빌(Montville)과 뉴저지주의 산악지대인 테일러타운(Taylor Town)에 교회를 개척하여 선교했고 졸업반 시절에는 뉴저지주 메디슨 시의 유명한 그린빌리지(Green Village)의 설교자로 추천될 만큼 유망한 학생이었다.

그는 선교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기도하고 믿고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룩됨을 믿었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의지한 전도자였다. 그러므로 아펜젤러는 찬송하기를 즐겨하였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 “주 예수 우리 구하러 큰 싸움 하시네” 등을 즐겨 불렀다. 또한 기도하며 전도하기를 즐겨하여 1881년 2월 23일 23세인 대학 3학년 시절 선교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때 돈이 조금밖에 없는 것을 안타가워 하며 가지고 있던 2.50$ 모두를 선교 헌금하였고, 그날 그의 일기에 “나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봉사하는 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라고 썼다.

아펜젤러는 1884년 10월에 미 감리회 선교부 총무인 리드(J.M. Reid) 목사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제의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부름으로 믿고 승낙하였고, 12월 17일에는 닷지(Ella J. Dodge) 양과 결혼하였다. 이듬해 1885년 2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Fowler)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이들 신혼부부는 다음 날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하여 한국선교의 첫 발을 내디뎠다.
태평양 선상에서도 아펜젤러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예배를 인도하였다. 스크랜튼 박사(Dr, Willam B. Scranton)는 이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85년 2월 15일 주일에 태평양 위에서 바다가 몹시 사나울 때 그는 우리에게 설교하였다. 설교를 듣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적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그런 설교를 했다. 이 날 그는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을 가지고 예배 인도했다. “내가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아펜절러는 2월 27일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한국선교사 일행(스크랜튼 가족)을 자기 선실로 모이게 하여 안전한 여행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앞으로도 모두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방향을 제시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한국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도 아펜젤러는 무엇보다도 먼저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즉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 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아펜젤러는 1885년 7월 17일 서울 정동에 주택을 마련하고 “지성소“ 즉 예배실을 구별하여 꾸미고 7월 29일 첫 입주예배를 드렸으며, 10월 11일 주일에는 첫 성찬예식을 집례하여 감리교인들의 공동체를 확립하였다.(현, 정동제일교회 창립일)
또한 1887년 10월9일에는 전도인 양성을 위해 별도의 가옥을 매입하여 벧엘이라 칭하였고, 토착 전도인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열었다.(현,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 창립일)
이로써 오늘날 ”정동교회“를 이루게 하였다. 또한 방 하나를 교실로 하여 1885년 8월 3일 고영필, 이겸나 두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여 오늘날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시작했다.
그의 교육은 곧 복음전도였고 전도인을 양성하며 신앙을 지닌 민족의 지도자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이 학교 교훈도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欲爲大者 當爲人役)이었다. 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3-28)의 성경 말씀에서 온 것이다. 실제로 아펜젤러는 이 말씀대로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아펜젤러는 기골이 장대한 사람으로 건강하고 운동도 잘하였다. 그는 1885년에 5 피드 11.5인치(약 179cm) 키에 200파운드(약 91kg)의 몸무게로 갈색머리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1891년 31세로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그는 140파운드(약 62kg) 밖에 안 되었으며 1900년 42세 때 두 번째 안식년의 휴가시에는 131파운드(약 60kg)로 머리는 희고 허리는 굽어져 그의 가장 친한 친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얼마나 한국 선교사역을 감당키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던 중 결국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회의를 위해 목포로 항해하던 중 칠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갑판에 있었으므로 구조선을 탈 수 있었지만 동행하던 조한규(趙閑奎) 선생이 아직 선실에서 나오지 못한 것을 알고 자기를 돌보지 않고 다시 배 가운데로 들어갔다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펜젤러는 애국애족 하는 민족구원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아펜절러는 서울을 중심으로 평양지역 선교와 인천, 수원, 공주뿐 아니라 대구, 부산, 전주에도 교회를 세우며 전도하기를 힘썼다. 그는 1895년 한국 최초 교회를 건축에 착수하여 1897년에 준공하였는데, 이 교회가 현재 남아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으로 정동교회이며, 이곳에서 독립협회 집회가 모이기도 하였다.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선생 등 민족구국의 선각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설교는 단순히 복음전도의 차원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구원을 위한 애국애족의 활동이었다.

아펜젤러는 교회 교인들에게 애국가를 부르게 하였고, 태극기도 게양하게 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하면서 누구나 뜻있는 시민들이라면 토론회에 참가시켜 나가자 당시 수구당파의 모략으로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어 독립협회는 해체되었고 주모자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아펜젤러는 감옥을 찾아다니며 음식과 의복뿐 아니라 성경과 서적도 넣어 주며 그들은 돌보아 주어 이때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이승만, 이상재 선생 같은 이들이다.
아펜젤러는 은밀히 남을 구제하기에 힘써서 엄동설한 찬바람이 부는 때 정몽호란 팔십 노인이 냉방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많은 금전으로 구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1885년 8월 17일 제1회 한국선교회가 모였을 때도 한국 기독교의 장래를 위해 일본에 있는 세 명의 한국인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것을 제의하고 결의케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교비를 한국에 모두 바쳤고 마지막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한국의 구원을 위해 바쳤다. 아펜젤러는 순직 마지막 날까지 한국에 대한 사랑과 소망의 열정을 불태웠다.

아펜젤러가 순직하기 직전 최후의 강연들을 보면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는데 그 마지막 말은 “자,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 그 나라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 지금이 좋은 기회이다.”라는 말이다. 그는 미국 전역에 한국 선교의 소망을 불어넣었고 1901년 10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1902년 6월 11일에 순직하였던 것이다.

우리 한국기독교는 아펜젤러의 근면 성실한 신앙생활 훈련과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온전히 헌신하기를 힘쓴 선교열정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앙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로써 민족구원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였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ch)



'한국 기독교사 사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성탄절은?(1885-1887, 1897년) (1) | 2023.12.18 |
---|---|
존 로스, 첫 한글 성서 번역:"하느님/하나님"으로 (2) | 2023.12.15 |
“이웃사랑”(愛隣)의 목회, 사회사업의 선구자 (0) | 2022.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