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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의 현상황

동남아 이슬람-기독교 분쟁지역과 한국 기독교

동남아 이슬람-기독교 분쟁지역과 한국 기독교
-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중심으로 -


노 종 해(CM리서치)


                                    *인도네시아 교회 테러


I. 머리말

최근 말레이시아 개신교와 캐토릭이 연합되어 구성된 ”말레이시아 기독교 연맹“(CFM, Christian Federation of Malaysia)은 2002년 들어서며 말레이시아를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로 만들려는 움직임에 대해 기독교의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며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성명서(2002년 1월)를 발표했는데 성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수상은 말레이시아가 이미 이슬람국(Islamic State)으로 무슬림과 비 무슬림에도 관심이 일고 있다고 표명하였다. 실제로 복합사회로부터 말레이시아의 “이슬람화“(Islamising) 과정은 지난 20년 동안 진행되어 왔으며 말레이 국민연합(UMNO)과 말레이 이슬람당(PAS)이 득표를 위해 경쟁하며 더욱 격렬해졌다. 사실 코란에 근거한 이슬람국의 모본은 없으며 정부나 국가의 형태도 없다. 오늘날 여러 이슬람국가들도 보수적이며 방어적인 종교 정치가 이슬람 통치 유형에 위협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점에서 말레이시아는 무엇 때문에 이슬람 정부를 세우려하는가? 더욱이 연방 헌법에 이슬람국이란 규정이 있는가? 왜 이슬람국 이어야 하는가?” (1)

오늘날 말레이시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는 “이슬람화” 운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 부흥운동”, “극단주의 자”, “무슬림군 무장운동”, "이슬람 개혁운동“, “테레리스트”, “성전 지하드”등과 구호가 메스컴을 장식하고 있고, 실제로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이슬람국가로 만들려는 무장운동도 단체도 적발되었다. 즉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과 필리핀을 연대하고 있는 무장군 단체가 알-콰에다 테러집단과도 연계되어 있음이 적발되어 정치 사회적 문제와 위기의식 속에 있다. 무슬림이 다수 지역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이슬람화“(Islamization) 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있고, 무슬림이 소수민 지역 태국과 필리핀에서는 국가로부터 독립 분리 운동(Separatist)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동남아 지역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이슬람이라 하면 중동 이슬람으로 알지만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최대 이슬람 지역이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왜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강한가?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갈등 분쟁이 왜 일어나는가? 동남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를 무슬림 다수 지역인 인도네시아와 소수지역인 필리핀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려 한다. 이들 지역은 지금도 폭력으로 분쟁과 갈등 속에 있으며 국제문제화 되어있고 외국군대 까지 끌어들여 전쟁하고 있기도 하다.

II. 동남아 이슬람의 도래와 특성

동남아시아 군도는 원시 정령신앙(Animism)을 기반으로 인도로부터 힌두교 불교가 들어 왔고 인도와 아랍 상인들로부터 이슬람이 전해졌다. 말레이 학자 파티미(S.Q. Fatimi)는 인도와 아랍 무역상들의 동남아시아에 최초 접촉한 연대를 674년이라 하였고, 878년에는 이슬람이 말레이 반도 해안에 정착한 흔적이 있으며, 1204년에는 대규모 개종이 이루어져 정치 세력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2) 이들 상인들은 말레이 군도(Malay Archipelago) 지역을 다니며 원주민 종족들과 상호 왕래하였고 11세기 인도네시아 군도와 말레이 반도(Malaya)에 무역로를 정착시키며 말라카 왕국을 이슬람화 시켰다. 1478년에는 중 동부 자바 내륙의 마자파힛(Majapahit)왕국이 말라카 왕국에 합병하였고 보르네오 섬인 깔리마딴(Kalimatan)을 이슬람화 시켰다. 이슬람은 필리핀 남부인 민다나오와 술루, 필리핀 북쪽 루죤(Luzon)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1511년 폴투칼이 말라카 왕국을 무너뜨리며 서구 식민 통치 세력이 들어오기까지는 이미 곳곳에 무슬림 슐탄(Sultan) 왕국이 설립되어 있었다.

무슬림 상인을 통해 마을마다 모스크를 중심으로 코란과 이슬람법이 가르쳐졌고, 교사와 학생이 함께 기숙하며 가르치는 전통방식의 학교가 설립 되어 코란과 이슬람법 뿐아니라 무슬림 삶을 익히는 교육 체계를 이루어 이슬람 신앙을 심화 시켜 나갔다. 이러한 학교가 자바의 뻐산뜨렌(Pesantren), 말레이의 뽄독(Pondok), 마드라샤(Madrasah)이며 이슬람 학자 울라마(Ulama)와 지도자를 배출시켰다. 말라야 대학 후세인 알리 교수는 이슬람이 퍼져가는 중요한 길은 마을(Village)이라고 했다. 마을은 모스크(Mosque)와 기도처(Surau)가 사회활동은 물론 종교신앙의 중심지이며 마을마다 설립된 뽄독학교(Pondok School)가 이슬람 신앙을 말레이 사회에 뿌리 박게 했다고 지적했다.(3) 또한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 지역의 무역과 문화 중심지로 급 성장하면서 동서 무역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말레이 언어는 동남아에 널리 퍼져 유럽의 라틴어처럼 중심 언어가 되었다.(4) 바뚜말레이(S.Batumalai) 박사는 “이슬람은 왕족과 혼인, 상호결혼, 수피(Sufi)의 활동, 왕족들의 개종, 무역상들과 군인들을 통해 퍼져나갔다. 무슬림들은 16세기 스페인처럼 정복자로 오지 않았고 개종의 수단으로 칼을 사용치도 않았다. 그들은 우월의식과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원주민들과 같이 낮추었다”고 지적하였다.(5) 이러한 동남아시아 이슬람의 특성은 무엇인가?

1. 동남아 이슬람과 슈피 이슬람 신비주의(Sufism Islam, Mysticism)

말레이시아의 학자 알아타스(Syed Nagub al-Attas)는 슈피 이슬람은 상인들과 무역인들을 통해 생활 속에서 스며들 듯 전해져 동남아시아 이슬람이 근간을 이루었다고 했다. 슈피사상(Sufism)은 1488년 말라카에서 형성되었으며 말라카 왕국 슐탄 자신이 슈피였고 슈피사상(Sufism)과 교단이 슈마트라와 동부 군도까지 넓게 설립되었다. 당시 동남아 수피사상을 수립한 지도자(Ulama)들은 “함자 판스리”(Hamzar Fansuri),“입눌 아라비(Ibnul Arabi)”, “삼술 딘 알슈마뜨라니(Samsul-Din al-Sumatrani)” 같은 사상가들이다.(6) 슈피 이슬람은 중세 기독교 수도원과 같이 스승을 중심으로 공동생활하며 영적 훈련에 들어가 내적인 깊이의 신앙을 형성시켰으며, 금욕주의(Asceticism)를 통해 자기부정에서 정화단계를 거쳐 신과 하나 되는 체험을 이루어 신앙의 기쁨을 경험한다.(7) 슈피교단 중 따리콰(Tariqah) 교단의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겸손의 단계(Nasut)로 이슬람법(Shariah)에 순종하는 것, 둘째 정화의 단계(Tariqah), 세째 헌신과 절제의 단계(Malakut), 넷째 신지식의 단계(Marifah), 다섯째 신의 은총으로 인도 받는 단계로 진리에 이르게 된다(Haqiqah). 타리콰 회원은 배타적이 아니며 세습되지 않고 슈피들은 가난한 계층에 가서 봉사해야 하며 인내로 헌신하고 겸손해야 한다.(8)

슈피 사상은 신과 합일에 이르는 엑스타시(Ecstasy)와 영적 치료(Spiritual healing)를 강조하며 초자연적인 힘과 능력을 받으려 한다. 또한 의식과 법, 제도와 형식보다는 내면적인 신(神) 지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슈피신앙은 동남아의 원시 신앙인 정령신앙(Animism)과 융합되어 자연스럽게 이슬람을 자신의 종교로 수용케 되었다. 나시 타마라(M. Nasir Tamara)는 슈피즘이 인도네시아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자바 신비신앙(Kebatinan) 등 다른 토착 신비 신앙형태와 융합하여 뿌리를 내렸다고 지적했다.(9) 슈피신앙은 동남아 이슬람 신앙과 선교 운동의 기반이 되었고 슈피 교사들이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가르쳐 이슬람이 퍼지게 하였다. 동남아 이슬람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코란이냐? 칼이냐?”는 전쟁 방식으로 전래 된 것이 아니라 토착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뿌리를 내려 이슬람으로 흡수하였다. 동남아 이슬람은 신앙 내면적 깊이가 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 동남아 이슬람과 토착 민속 관습에의 적응

슈피 신앙은 민속 신앙(Folk beliefs)와 혼합 이루어 종교생활은 코란과 하디스(Hadith), 이슬람 법인 샤리아(Shariah)를 따르기보다는 관습법(Adat, Customary law)을 따르며 이슬람 법정이 있더라도 관습법이 더 상위에 있는 사회이다. 이점에서 동남아는 무슬림이 다수라 하여도 “이슬람국가”는 아닌 것이다. 인도네시아 학자인 나시르 따마라(M. Nasir Tamara)는 인도네시아 인구 중 90%가 무슬림며 세게에서 가장 큰 무슬림 지역이지만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이 아니다. 이슬람법(Shariah)에 근거 둔 법 체제가 아니고 인도네시안 법(Indonesian Law)이기 때문이다”(10)고 했다. 우리가 동남아에서 전통적인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푸다”(Pudah) 같은 머리 스카프를 쓰고 있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으며 스카프를 써도 변형된 형태로 착용하고 있음도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이 무슬림이 대다수이지만 이슬람법으로 통치되지 않고 있음도 전통 관습의 무슬림(Adat Muslim)이기 때문이다. 싱가폴대 정치학교수 후세인 무타립은 동남아 이슬람이 “관습(Adat)"에 기반 두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토착문화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11)

3. 동남아 이슬람과 종족 중심(Ethnicity)

동남아는 수많은 군도와 종족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주요 종족은 말레이 인종으로 이 지역 이슬람은 말레이 정체성과 직결 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타립은 동남아 지역 무슬림은 종족 중심의 이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이슬람과 말레이 종족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가 말레이 문화와 정체성(Identity)의 중심이라고 하면서 “이슬람은 말레이의 신앙일 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의 근거“라 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말레이(Malay)와 비말레이계(Non-Malay) 간의 정치적 갈등의 주요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12) 말레이 민족주의는 이슬람에 원리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종족 차별화에 역점을 둔 종족적 민족주의이며, 이슬람은 말레이인들의 정신적 결집력을 강화시키는 촉매 역할하였다.(13) 헌트(R.Hunt)는 필리핀 남부 섬들도 토착문화 전통과 이슬람 정체성(Islamic Identity)이 강하기 때문에 스페인이 군사력으로 정복시키려 해도 실패하였고 오히려 종족일체성(Ethnic Identity)으로 강화되었다고 했다.(14)


III. 동남아의 서구 식민 세력의 진출과 기독교

동남아의 서구 식민 세력의 진출 목적은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폴투칼 왕은 1461년 교황 비오2세로부터 “그리스도 교단의 위대한 군주”(Grand Master of the Order of Christ)란 칭호를 받았다.(15) 네델란드도 칼빈주의 개혁교회로 무역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목적을 가졌다.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은 이미 700년 동안(732-1492) 무슬림과 전쟁한 나라이며 이슬람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필리핀 통치 기간 320년을(1578-1898) 기독교 화 시키려하였고, 무슬림을 적으로 알고 파괴시키려 해 스페인과 모로 전쟁을 일으켰다. 바뚜말레이 박사는 동남아 인들은 서구 식민세력을 “기독교 십자군”(Christian Crusade, Jihad)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16)

1. 서구식민 통치하의 인도네시아와 기독교

폴투갈은 동남아에 무역과 교회를 동시에 설립하였으나 선교사의 활동은 지역 통치자에 의해 저항 받았고 식민 통치세력과 협력하여 이슬람과 갈등을 이어왔다. 폴투칼은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하고 교회를 설립하였고 원주민들과 상호 결혼하여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캐토릭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프랜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가 16세기에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하고 1547년에는 몰루카 섬을 방문하여 암본(Ambon)에도 교회를 세우며 선교활동하여 1590년에는 신도수가 4-5만 명으로 성장하였고 첫 말레이어 번역 사역도 하였다.(17)

밀튼 마이어는 폴투칼의 동남아 진출 목적이 인도에 이르는 해상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집트, 아랍을 물리치고 동남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이지만 무역을 따라 예수회 선교사들도 동행하여 교회를 세워 무역과 전도가 일치했다고 지적하였다.(18) 폴투칼은 향로섬 인근 띠모르(Timor)를 차지하였으나 1641년 네델란드에게 넘겨주었다. 네델란드는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고 독점권을 부여받아 오늘날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에 무역 중심지를 세웠다

1) 폴투칼 캐토릭과 인도네시아

폴투칼 캐토릭 선교사들은 본토 언어를 배웠고 복음을 원주민들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엄격성과 우월의식이 원주민 관습을 부정하고 폴투칼의 정책과 경제적 요구에 부합하기 때문에 원주민들과 갈등을 일으켰다.(19) 윌리람 왓트(Wm Watt)는 선교사들이 유럽인과 서구문명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서구를 모본으로 가르치며 원주민과 문화를 멸시하는 우월의식(Superiority)이 선교 실패의 중요한 요인이라 지적했다.(20) 무슬림들은 폴투칼 선교사들의 활동이 이슬람 군주들과 지도자들을 모독한 것으로 여겨졌고 선교사들은 폴투칼 군대의 보호 아래서만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원주민들은 이슬람 군주들에 충성하고 이슬람 신앙에 열심하며 식민통치자들 보다 자신들의 지도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충실하였다.

2) 네델란드 개혁교회와 인도네시아

더치(Dutch)는 1605년 암본(Ambon)을 점령하고 폴투칼인들을 추방했으며, 그들 관활권 내의 캐토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캐토릭을 개신교로 개종시키려 압력을 넣었다. 더치 동인도회사는 신앙심 있는 직원들로 선교사역 하도록 하여 점차 퍼져 나갔다. 이런 분들이 말레이어로 성경번역 출판키도 하였다. 작은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들이 더치교회들과 연결되어 성장하였으며 17세기말에는 군도의 교인 수가 10.000명 정도 되었다.(21)

스테픈 네일(Stephen Neil)은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온 것은 무역이 목적이지만 기독교 국가 되는 것도 계산에 넣었다고 했으며, 교회와 국가가 밀접한 관계에서 초창기부터 신앙인들을 관리로 보내 관리가 곧 전도자(Preacher)이였다. 동인도 회사의 헌장에 기독교 전파와 학교설립을 의무화했다.(22) 1635년 3월 3일, 정부 관리와 교회간에 협정을 맺어 개혁교회를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며, 불신자들이나 무슬림들도 “한 분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동인도회사와 전도를 직결 시켰다. 그래서 회사 예배를 통해 물질 받고 세례 받는 ”돈으로 된 제자“(Disciple Money)라는 말까지 생겼다.(23)

인도네시아는 선교단체에 의해서 선교된 것이 아니고 정부와 동인도 회사 관리가 전도자(Chaplains)를 겸하여 회사 관활 지역 안에 교회를 세웠으며 1776년 당시 기독교인이 200,000명이나 전도인 수는 22명의 관리가 있을 뿐 현지어를 사용하는 이는 5명에 불과 하였다고 스테픈 네일은 지적하였다.(24) 영국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죤 웨슬레에 의해 일어나 선교 운동이 일어날 때 네델란드에서도 1779년에 ‘화란 선교사회“가 결성되었고, 1813년에 3명의 선교사가 안수 받았으며, 이들이 1814년 5월 26일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세마랑(Semarang)과 암본(Ambon)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교회들은 식민 정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세계교회와 연대를 이루지 못하였고 반 식민(anti-colonial)이 반 선교사(anti-missionary) 운동으로 뒤따르게 했다.(25)

3)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갈등문제

인도네시아는 1945년 3월 독립준비활동 위원회(BUPKI)를 설치하고 이슬람계 4명, 민족주의자 4명, 기독교대표 1명으로 9인의 소위원회를 발족하여 헌법의 근간인 자카르타 헌장(Piagam Jakarta)과 국가이념 5대원칙인 “빤짜실라”(Pancasila)를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는 “이슬람교도에게는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적용할 의무”가 있다고 했으나 동부 군도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반발하여 신생 공화국에 합류치 않을 것이라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종교문제로 인도네시아의 통합이 방해 되서는 안된 다고 인식해 이 문구가 삭제되고 “최고 신에 대한 신앙”(Ketuhanan yang Maha) 구절로 대치되어 1945년 8월 17일 공화국 헌법으로 공포되었다.(26) 인도네시아 국민은 누구든지 이슬람, 기독교, 천주교, 불교, 힌두교 등 5개 종교 중 택일해야 하며 무신론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도네시아는 세속국가(Secularism)도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질서“(New Order)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이슬람법 위에 세우는 이슬람국를 요청하며 무슬림의 정치적 입지를 확장시키려는 세력간에 갈등이 있다.(27)

2. 서구 식민 통치하의 필리핀과 기독교

1) 스페인 식민통치와 필리핀

스페인은 1517년 마젤란이 필리핀 군도에 첫 도착하였고 1542년 빌라로보스(Villalobos)가 필립(Philip)2세가 된 당시의 황태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필리핀“(Philippines)이라 하였다. 1565년 체부(Cebu) 섬에 첫 기지를 두었으나 보르네오 섬에서 무슬림을 접한 후 1572년 마닐라로 식민 정부의 중심을 옮겼다. 마닐라에서 무슬림들의 저항을 받았으나 쉽게 제압하였고 무슬림들은 남부 민다나오와 술루(Sulu) 군도로 이주하였다. 스페인은 남부 지역 군도 민다나오에서 북 보르네오까지 작은 섬들을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음을 알고 1578년 스페인 총독은 칼의 힘으로 정복하고 개종시키려고 남부 모로(Moro)족들과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스페인은 남부 무슬림들을 ”모로“(Moro)라 불렀는데 이는 모로코에 사는 무슬림 인종인 ”무어“(Moor)인과 비슷하다고 보아 경멸하는 뜻에서 부른 이름을 지금도 필리핀 무슬림들은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은 십자군 전쟁의 연장으로 정복과 개종으로 여겼고, 이 전쟁이 스페인-모로 전쟁(Spanish-Moros Wars)으로 32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28) 스페인은 이 전쟁에 북부 기독교 필리피노(Filipino) 개종자들을 징병하여 모로와의 전쟁에 투입시켜 필리핀 내부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결국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8년 물러갔으며 미국이 모로와의 전쟁을 이어 갔다.

2) 미국의 통치와 필리핀 남부 모로

1899년부터 필리핀을 통치한 미국의 필리핀 기본 정책은 착취대상에서 개발 시켜 문명화시키며, 교육시켜 자치능력을 훈련시키는 정책으로 변환하였다. 1901년 이후 1년 동안 1,000여명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들어와 교회,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며 복음 전도하였다. 미국 정부는 필리핀으로 하여금 미국식 민주제도를 도입케 하여 영어를 공교육 체계에 강조하였으며 3권 분립 제도를 갖게 하고 국가와 종교를 분리 시켰다.(29) 미국은 초기 유화 정책을 써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며 공공 자선 사업을 베풀었으나 남부 무슬림들은 자녀들을 개종시키려 한다고 보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미국 행정부는 남부 모로 지역을 기독교 필리피노의 행정 아래 두어 기독교와 무슬림 간에 반감을 갖게 하여 분열을 가져오게 하였다.

미국은 모로지방(Moro province)을 설정하여 무슬림지역에 고위직 군 장교, 지방 경찰, 교장직 등은 미국시민이 담당케 하고 지사는 모두 군장성으로 임명하여 직접 통치에 들어갔고 북쪽 루손지역 필리피노들을 대거 남부로 이주시켜 무슬림 개화와 자율 개발을 추구하였으나 미국의 직접 통치는 모로와의 충돌을 일으켰다.(30) 미국은 정책을 변경하여 정부는 내에 민다나오 술루부를 두어 중앙정부 관활에 두고 모로 문제를 마닐라 내무부의 비기독교 종무국 소속으로 이전 시켰으나 무슬림들은 소수민으로 전락함을 반발하여 필리핀 정부로부터 독립 분리운동을 일으키고 있다.(31)

필리핀 독립 후 남부 모로 문제가 필리핀 정부로 이양되면서 소수 무슬림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1969년 모로 해방 전선(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 MNLF)를 조직하였고, 이슬람 국제기구(IOC), 중동 이슬람국들의 지원을 받으며 필리핀 정부와 1976년 12월 23일 트리폴리협약(Tripoli)으로 민다나오, 술루 및 빨라완 지역 13개주에 무슬림 자치 기구를 설정하고 정부와 휴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1977년 주민 투표에서 기독교 지역 3개주를 제외케 됨으로 MNLF는 투표를 거절하였고 내부분열이 되어 더욱 보수 노선을 추구하는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이 1984년 3월에 결성되었다. 1989년 민다나오 자치 법이 통과되어 주민 투표를 실시한 결과 4개 주만 자치지역으로 귀속 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하고 “모로국”(Bangsa Moro)으로 독립 분리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인근 이슬람 국들과 중동 이슬람 국가의 지원으로 국제문제가 되었다.(32) 필리핀 야요로 대통령은 400년이 넘는 지리한 모로와의 전쟁에 “테레와의 전쟁”이란 명분으로 미군을 다시 끌어들여 남부 무슬림 지역과 게릴라 전쟁을 치르고 있다.

3) 필리핀의 기독교화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캐토릭 국가이다. 어떻게 필리핀은 기독화 되었을까? 레이첼리스(Mary Racelis)는 “농민들을 군대와 관리들의 학대로부터 보호한 인정 있는 스페인 선교사들의 결과”이다고 했다.(33) 필리핀 선교사들은 스페인 점령군과 함께 왔다. 어거스틴 교단(Augustine Fiare) 프랜치스칸, 예수회 선교사들이 스페인 군대가 있는 곳에 함께 나가 퍼져 나갔다. 1606년에는 선교사들이 필리핀 남부 섬들을 제외하고는 전역으로 확산되 나갔다.

필리핀은 주민 대부분이 토착 원시신앙인 정령신앙(Animistic belief)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종교도 설립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필리핀 사회는 바랑가이(Barangays) 사회구조로 50-100호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촌장에 지도를 받았을 뿐이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농촌 마을에서 함께 살며 바랑가이 촌장들과 친밀하게 사귀었고 기독교에 대해 가르칠 수 있었다. 이러므로 원주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그들의 신앙과 많은 부분이 동화되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선교사들은 새로운 농경법도 가르쳤고 새로운 산업도 소개하였다. 교회를 중심으로 흩어진 농부들의 인구를 집결 시켰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였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사역 3세기 동안 이러한 도시들이 수 천 개가 형성되었고 군도의 사회적 환경을 개조하였다. 스페인 치하에서 교회와 국가는 일치되어 캐토릭 교회가 선교사와 정부 관리들의 노력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스페인 군인들이 개종자들을 보호해 주고 교회 종소리 안에 살도록 정착지를 주었다.(34)

선교사들은 교회 공동체를 연계시키고 더 발전시켜 공공사역도 이루어 나갔다. 즉 도로, 다리, 관개수로 등을 개발해 나갔다. 또한 학교를 세워 87개 언어와 방언으로 나눠진 사람들에게 공통어로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었다. 선교사들의 사역 결과는 필리핀 사회 구조를 변화 시켰고 남부 무슬림 지역을 제외하고는 필리핀 거의 전 인구가 기독교로 개종했다.(35)

그러나 18세기에는 교회와 사제들이 대지주가 되고 원주민들은 토지 사용권과 토지를 강탈당하여 빈번한 폭동이 일어났다. 자영농민들이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이 결과 반 성직자 반란(Anti-Clerical rebellions)이 일어나게 되었고 스페인은 필리핀인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타지방으로 보내 반란을 진압케 하므로 필리핀 사회에 분열과 반목의 씨를 심어 주었다. 이런 분위기가 19세기에는 필리핀 식민 사회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스페인을 축출하자는 반란의 발단이 되었다.(36) 그러나 필리피노 대다수는 캐토릭을 옹호하였고 그들의 신앙은 전통적 정령신앙을 캐토릭 신앙에 혼합시킨 민속(Synchretistic Folk) 신앙과 결합된 특성을 가지고있다. 

IV. 동남아 근대 국가 형성과 무슬림 사회의 구조

동남아 국가들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수립하며 무엇보다도 이슬람 부흥운동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이슬람 국가를 지향해 나가므로 전총 사회와 갈등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동남아 사회에서 왜 분쟁이 일어나는가를 그 사회의 특성과 갈등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앙그레 드소자(Andreas D'souza)는 식민 지배에서 경제적 발전을 일으키고 개발하는 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방향을 “이슬람 재 발흥”(Islam Resurgent)과 근대화(Modernization)로 나타났다고 분석하면서 동남아 무슬림국의 정치 발전을 3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유럽인 관리로부터 독립투쟁 단계로 이슬람은 지역 문화적 동질성을 형성해 민족주의를 일으키고 단결하며 이슬람은 대중을 움직이는 중요 구심점이 되었다. 둘째 독립성취가 국민연합(National Unity)과 발전을 위하는 단계로 반제국주의 목표를 국가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로 이끄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 세력이 재조직과 변천으로 점진적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 했다. (37) 

1. 아방안(Abangan)과 싼뜨리(Santri)의 사회구조

인도네시아 무슬림은 자바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와 종교를 실천하는 아방안과 정통 무슬림 신앙을 견지하는 경건한 무슬림 싼뜨리가 있다. 자바인 싼뜨리들은 순다인들과 대부분 인근 섬의 무슬림들로 정통 이슬람을 추구한다. 이들은 매일 5번 기도, 금요일 예배, 라마단 기간 금식, 코란을 읽고, 자카트(십일조)를 실행하는 신앙인으로 메카에 순례하기를 힘쓴다. 전통적으로 싼트리는 도시권에 살고 있으며 상인들, 공무원과 군인들 전문직에 많이 있다.

아방안은 주로 농촌 지역민들로 정령신앙에 바탕둔 민속 무슬림(Folk Muslim)이다. 싼뜨리와 아방안의 생활 방식은 구별된다. 싼뜨리는 공적인 일 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이슬람 규칙을 지키는 이들로 아방안의 온건한 생활이 엄격함을 추구하는 싼뜨리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38) 싼뜨리는 아랍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코란과 하디스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국을 추구하지만 아방안은 토착문화를 수용하며 복합 사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인도네시안을 추구한다. 아방안이 인도네시아 사회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이슬람 공동체(Ummah)를 형성시켜 무슬림국으로 만들려는 싼뜨리의 도전이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2. 전통주의자들(Traditionalist)과 현대 주의자들(Modernist)의 갈등

싼뜨리 중에도 전통주의자와 현대주의자로 구분된다. 현대주의자들을 개혁주의자(Reformist)들이라고도 한다. 현대주의자들은 소수이고 중동 개혁자들을 따른다. 즉 모하메드 압두(Mohammed Abdul)과 메카의 세잌 아마드 카팁(Sheikh Ahmad khatib) 같은 이들의 제자이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개혁주의자 운동(Indonesian Muslim reformist Movement)은 최근 시작되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모더니스트들은 무슬림 무하마디야(Muhammadiyah) 단체 회원으로 정치적으로는 금지된 이슬람당(Masjumi)를 동경한다. 모더니스트들은 서구교육 전통이 모델인 세속 공립학교와 대학에 자녀들을 보낸다.

반면에 전통주의자들은 무슬림 사회조직 나흐다뚤 울라마(Nahdatul Ulama, NU)에 속해 있다. NU는 1926년에 설립된 무슬림학자 단체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사회단체이며 동 자바농촌 지역에 강하다. 이들은 대체로 농촌 지역에 살며 전통적인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샤(Madrasah)와 뻐산뜨렌(Pesantren)에 자녀들을 보낸다. 전통주의자들이 인도네시아 무슬림의 대다수이며, 보수적으로 진보와 현대화를 반대한다고 쉽게 보지만 실제로는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사회복지 위해 열심하고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외국 가치의 침입을 막고 회원간의 단결력과 성실성도 강하다며, 현재 인도네시아의 중심이루고 있다.(39) 헤프너(Robert W. Hefner)는 자바지역에서 선교사들의 활동과 노력으로 기독교 개종자들이 증가하는 것을 전통주의자와 현대주의자 무슬림들이 두려움과 위협을 느껴다고 했다.(40)

3. 지도자(Pemimpin, Leader)와 민중(Wong Cilik, People)의 관계성 변화 

프랑스 학자 라이렌(Railen)은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제를 지도자와 민중의 차이와 갈등에서 찾았다. 즉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성의 변화이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민중(The Wong Cilik)을 “모스크에 모이는 가난한 평민이나 메카에 순례 갈 능력 없는 사람들“로 이들 이슬람을 ‘대중 이슬람”(Pop Islam)이라 했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엘리트는 싼뜨리의 콰이(Kyai)와 아방안의 쁘리아이(Priyai)로 지도자 계층이지만 이들은 항상 민중을 특히 선거 때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다. “대중 이슬람”(Pop Islam)은 인기 가수 로마(Rhoma)의 “대중 무슬림”(Pop Muslim)이란 가사에서 온 것으로 “이슬람 신앙의 전사”(Satria dakwah), “하층에서 온 왕”(Raja dari bawah)으로 1천 5백만의 팬을 가진 가수이다. 이런 “대중 이슬람”들이 모스크를 채우며 기도하고 증언 들으며 최근 경건한 무슬림이 되고 있다. 이들은 원래 아방안이지만 무슬림 민중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41)

4. 이슬람의 재 발흥과 신 무슬림(New Muslim)

최근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경향은 이슬람 정치단체가 공식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지하에서 조용히 움직이던 무슬림 세력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슬람 사상이 정치 뿐 아니라 사회 사상 분야에도 활발해지고 지적활동도 활발해졌다. 서구 뿐 아니라 중동 지역의 서적들이 번역되어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Muslim Brotherhood), 세드 콰툽(Syed Qatub), 이란 혁명기에 유명한 지성인 알리 샤리티(Ali Shariti) 저서와 호메이니 저서도 인기리에 팔린다. 반둥의 출판사는 최근 이슬람 서적을 수 백권 출판하였고 이슬람 책만 특별히 출판하는 출판사도 등장했다. 주요 도시에는 다양한 토론 단체들도 형성되어 대학 총장들이 모스크에서 빈번히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토론회에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가장 유명한 곳은 반둥의 살만모스크(Masjid Salman)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영향끼친 엔지니어링 강사 이마두딘(Imadudin) 지도력의 근원지이다. 이마두딘은 국제적 연대를 가진이로 메카에 순례했으며 유럽, 미주 포함해 리비아 파키스탄등 여러 이슬람국을 여행하고 “무슬림 학생 지도자” 단체를 결성한 지도자이다. 또한 “정신훈련과정”(mental tranning coiuse)의 지도자로 무슬림 청년들을 일으키며 용기를 주는 분이다. 1971-1973년 이마두딘은 ”말레이시아 이슬람 청년당“(ABIM)에서 이슬람 재발흥운동을 시작케 하여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같은 지도자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마두딘은 자카르타와 반둥에 이슬람 학회(Islamic Study)를 조직하여 기르쳤는데 이 출신들이 지금 대학교수 및 지도자로 퍼져 있다. 그는 이슬람을 현대적 해석으로 영향을 주는 경건한 무슬림으로 ”인도네시아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하여, 코란과 하디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실한 무슬림 백만 명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이다.(42) 21세기를 들어서며 무슬림 지성인들이 시민 사회를 이루고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5. 시들고 있는 서양의 가치와 매력

동남아 이슬람의 재발흥의 중요한 현상은 서방 세계의 매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서구문명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30년 이상 지나며 볼 때 더 이상 발전하는 사회의 모본이 아니다고 보고 있다. 많은 지성인들과 서민들이 인도네시아의 정치 사회 안정과 발전, 평등문제 경제위기 실직자 문제등 많은 문제의 해결 방안을 묻고 있다. 때로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서구사회로는 이러한 문제에 해답이 없고 이슬람 사회를 비평할 자격도 없다고 본다. 서구인들은 이슬람 교훈에 대한 이해도 없고 이슬람 문화 이슬람 문제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편견에 치우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언론인들은 무슬림에 대한 보고서의 90%가 서구 매체를 통해서 온다 비판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와 이슬람에 대한 논쟁도 일반적인 무슬림 교육조차도 받지 않은 비 지성인들이라 비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는 무슬림인데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는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것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기독교는 서구 식민 세력과 결함 되어 있다고 보아 반 서구가 반 기독교로 돌출 되어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헤프너(Robert W. Hefner)는 “신 질서”에서 종교와 정치를 개관하면서 무슬림과 비무슬림들 간의 폭력은 종교다원주의(Plu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가 원인이라고 분석하였다.(43)

타리비(Naimah Talibi)는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의 문화적 사회적 재발흥은 “서양 가치”(Western Values)에 대한 거부라 했다. 타리비는 인도네시아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무슬림 인구가 대다수임에도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가 아니다. 그렇다고 세속국가(Secular State)도 아니다. 국가의 도덕적 기반을 어떠한 종교에 두고 있지 않을 뿐이다. 국가의 철학은 펀차실라(pancasila)로 다양한 종교를 국가의 기반 위에 둔 것이다. 여기에 종교와 문화의 다원주의(Pluralism) 수용이 인도네시아인 공공생활의 지배적인 자세가 있다.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이슬람은 다른 중동 국가들 보다 인자하며(Benign) 온건하다.“(44)

V. 맺는말

동남아시아는 수많은 섬으로 이뤄져 한번도 중앙집권적 왕국이 형성된 역사가 없는 지역이며 다인종 다문화의 지역으로 종교다원주의(Pluralism) 사회다. 이슬람이 이 지역의 대다수 종교이기는 하나 이슬람법인 샤리아(Shariah)와 하디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이슬람 국은 아니다. 동남아 이슬람은 전통문화에 적응되었으며 신앙의 내면화를 이루는 슈피(Sufi) 이슬람으로 온정적이며 평화를 추구하는 무슬림들이다. 그러므로 동남아 지역의 무슬림들은 개방적이며 상호 존중하고 이해할 줄 아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화 시키려는 움직임이 서구 식민 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동조를 받는 것 같지만 이 지역의 전통과 중심 세력이 아니다. 또한 반 기독교의 감정이 서구 식민통치자의 종교로 여겨져 이슬람을 더 퍼지게 하고 강하게 한 점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반 기독교 지역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분쟁은 기독교-이슬람간의 분쟁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를 정치적인,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고 부추키는데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종교공동체주의”(Communalism)이다. 마치 한국 사회의 병폐인 지역주의가 정치적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 이용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 지역을 위하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필리핀의 모로(Moro)들도 교회를 공격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며 정부 기관과 서구 단체인 것이다. 인도네시아 인들도 기독교인 마을을 파괴하고 교회를 불사르며 성직자들을 살해하는 폭동을 매스컴 통해 볼 수 있지만 이것도 자세히 보면 정치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이들의 책동인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우선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동남아 이슬람을 이해해야 한다. 무슬림은 폭력을 좋아하는 테레리스트들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에 대해 물리치고 정복해야될 기독교의 적으로 여겨왔고, 기독교의 이단으로 여겨 왔다.(45) 한국 기독교는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무슬림과 저들의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결점을 찾아 논박하고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신학 대학에 아시아 이슬람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시급히 개설해야 하며 연구소를 두어야한다. 교단 본부에도 아시아를 위한 위원회 및 정책 기구가 설립되어 복음 선교 뿐 아니라 기독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복음의 삶을 함께 살아야 한다. 서구화의 옷을 벗어버리고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는 저들 속에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우물가의 여인을 인종적 편견이나 종교적 우월감으로 대하지 않았다.(요4:1-26). 예수님은 그녀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셨다. 예수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눅10:25-37).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의 상처를 보았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하지 않았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같은 동족인지 피부가 어떠한지, 신분이 어떠한지, 재산이 어떠한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무슬림들이 들고 있는 무기와 주먹만 보아서는 안 된다. 저들의 삶과 상처, 아픔을 보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46)

한국 기독교는 동남아 무슬림을 교리와 사상으로 대할 것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슬림도 사랑한다고 믿는가? 예수님 주신 계명은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 하셨다. 이는 무슬림도 힘써 지키는 신앙이며 신앙의 핵심이다. “무슬림”(Muslim)이란 뜻 자체가 “하나님께 복종”이란 뜻이다. 기독교는 여기에 머무러 있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어서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말씀하셨다.

이슬람은 단결된 것 같아도 그렇지만은 않다. 저들도 약하고 분열되고 인종과 빈부, 사회적 신분 갈등으로 문제가 많다. 정치 안정과 경제발전,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과 가정문제 등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저들도 평화롭게 살기 원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기 원한다. 한국 기독교는 무슬림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왔는가? 서구의 시각을 가지고 이슬람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복하고 개종시켜야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는가? 무슬림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있는가? 죄인의 친구 되셔서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 되신 예수님처럼 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였는가? 한국기독교의 이슬람 선교 정책과 자세는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본 받아 살지 못하고 무슬림을 친구로 사귀지 못했으며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으로 여기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우리도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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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Malaysia as an Islamic State; an Analysis, Christian Federation of Malaysia, 2002.1
2. S.Q. Fatimi, Islam Come aspects of Sufism as understood and and practised among the Malays, S'pore:
MSRI,1963. P69
3. Hussin Ali, The Malays, Their Problem and Furture, KL: Heinemann Asia 1981., p48-49
4. Ibid, p11-12
5. S.Batumalai, Islamic Resurgence and Islamization in Malaysia, Ipoh;Chares Grenier,1999. p25.
6. Syed Naguib al-Attas, Some aspects of Sufism as understood and practised among the
Malays, Singapore; Malaysia Sociological Research Institute LTD,1963. p21-25
7. Ibid, p20
8. Ibid, p34-39
9. M. Nasir Tamara, Indonesia in the Wake of Islam, KL: Institute of Strategic andInternational Studies, 
1968. p1
10. Ibid
11. Hussin Mutalib, Islam in Malaysia, Singapore Univ, 1993. p11.
12. Ibid, p1
13. cf,류승완,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in 양승윤(편), 동남아의 이슬람, 한국외대, 2000. p77
14. Robert A. Hunt, Islam in Southeast Asia, a Study for Christians, Malaysia:GBGM, 1997. p30
15. 김웅태, 선교의 역사와 개념,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1993. p47
16. S.Batumalai, Islamic Resurgence and Islamization in Malaysia, Ipoh;Chares Grenier,1999. p30
17. Op.cit, Hunt ,p25-26
18. 밀튼.W.마이어(김기태역), 동남아사 입문, 한국외대, 1994. p60-61
19. Op.cit, Hunt,p17
20. William Montgomery Watt, Muslim-Christian Encounters, London: Routledge, 1991. p104
21. Op.cit, Hunt,p26
22. Stephen Neil, Colonialism and Christian Missions, London; Lutterworth Press, 1966. p74
23. Ibid p174-179
24. Ibid,p179
25. Ibid,p202
26. cf, 제대식, "인도네시아 이슬람사회의 정치변동", in 양승윤(편) ; 동남아의 이슬람, 한국외대, 2000. p139
27. Zafiq Zakaria, The Struggle within Islam, London; Penguin Books, 1989. p248-249
28. Robert Day McAmis, “Contact and Conflict: a Historical Survey of Muslim-Christian Relations in
the Philippines", J.Paul Rajashekar(ed), Islam in Asia, Perspectives for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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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김성철, 필리핀 무슬림, 전주대학교 출판부,2000. ,p72
30. Ibid,p84
31. Mary Racelis, "Christianity, the State and Civil Society in the Philippines", in N.N. Vohra(ed): 
Religion Politics and Society in South and Southeast Asia, New Delhi : Konark Pub, 1998. p159
32. Op.cit 김성철, p231
33. Op,cit M.Racelis, p231
34. Ibid,p164
35. Op.cit, R.Hunt,p27
36. Ibid,p28
37. Andreas D'souza, "Resurgent Islam, Its Political Implications for Asia", in N.N. Vohra(ed): Religion 
Politics and Society in South and Southeast Asia, New Delhi : Konark Pub, 1998 p31
38. M. Nasir Tamara, Indonesia in the Wake of Islam, KL: Institute of Strategic andInternational Studies, 
1968,p3
39. Ibid, p4
40. Robert W. Hefner : Civil Islam, Muslim and Democratization in Indonesia, Princeton Univ,2000. p108.
cf, Azyumardi Azra , "Islam and Christianity in Indonesia", Joseph A. Camille(ed),Religion and
Culture in Asia pacific, pp84.
41. M. Nasir Tamara, Op.cit, p5
42. Ibid, p7-8
43. Robert W. Hefner, Op.cit, p107.
44. Naimah Talibi, "The Rise of Islam in the Muslim Majority State of Southeast Asia", in N.N. Vohra
(ed): Religion Politics and Society in South and Southeast Asia, New Delhi : Konark Pub, 1998, p149
45. Hugh Goddard, A History of Christian-Muslim Relations, Edinburgh Univ, 2000. p38-39.H.Goddard 는 이
슬람을 기독교의 이단이라 최초로 논한 이는 칼케돈 회의 직후 John of Damascus,675-749 이라 했다.
46. Edward Fishe, Mindanao Mission, Archbishop Patrick Cronin's Forty Years in the Philippines, NY; The 
Seabury Press, 1978.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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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노종해
감신대, 동 대학원 졸. 1985년 선교사로 파송, 말레이시아 선교사.
쿠알라라룸푸르 동남아 선교센타장.
전 감신대, 목원대, 서울신학교(현, 협성대) 강사 역임.

-기독교사상:2002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