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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사역 이야기

3회)-UGM의 순회 복음전도 활동 이야기, 말라카


제3

말라카, UGM의  순회 복음전도 활동 이야기


노 종 해(CM리서치)

 

 

▲ 밀른과 UGM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온 오늘날 말라카 강에서

 


1. 복음전도에 불타는 “간지스 강 넘어 선교회”(UGM) 선교사들


   선교사의 모든 관삼은 직접 복음 선교에 있었다. 모리슨(R. Morrison)도 선교사로 출발 항해 중에도 선원과 승객을 모아 예배인도하며 설교하였고, 선교지에 도착하여서도 전도의 기회를 늘 찾았다. 때로는 너무도 결실이 없어 안타까워하며 자책키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모리슨도 밀른도 가가호호, 상점마다 다니며, 때로는 중국인사원(中國人寺院)에서도 전도하고 개종시키는 사역에 힘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밀른이 전도한 중국인 거리(바바스트릿)

 

    밀른(W. Milne)도 말라카에 도착하여 주일에는 더치교회(Dutch Church, 현, Christ Church Melaka)에서 설교하였고, 주일에도, 주간에도 길거리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세웠으며, 학교에는 체플(예배당)을 세웠다. 또한 인종 언어별로 “말레이 교회”, “인도인 타밀교회”도 개척 설립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밀른은 복음 전파하고 교회 세우 수 있도록 선교사를 요청하며 협력 선교해 나갔다.
  

  
▲ 밀른이 전도설교 Dutch교회, “Christ Church Melaka"


1) 모리슨의 중국인 첫 개종자-첵아코((Tsae A-Ko,蔡阿高)- 성서출판에 참여


     모리슨(Morrison)에 의한 첫 개종자는 첵아코(Tsae A-Ko,蔡阿高)로 1814년 세례 받았다. 모리슨은 “이러한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한지 7년이지나 이루어졌다”며 기뻐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영적 진리가 어떻게 이해되며 얼마나 느린 단계를 거치는 지를 기록하였다.


   “아코(A-Ko)는 첩의 소생이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 없이 16세때 세상 떠났다. 그는 21세 때 내 집에 왔고, 나는 예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전한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중국에서 나의 첫 경험이다. 3년 후 나는 더 잘 언어를 구사하고 쓸 수 있었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형제들도 인쇄소의 신약성서 출판 감독자로 채용하였고, 모든 시대 모든 족속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알도록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그의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는 자주 형제와 동료들과 다투어, 나는 그가 내하는 일에 없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안식일 마다 예배드리는 곳에 계속 참여하였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하였고, 교리문답이 포한된 십계명을 읽었다. 그는 십계명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자신의 본성이 잘못되었고 부패하여 친구와 형제들, 이웃들에게 의무를 성실히 수행치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지식은 부족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의 신실한 믿음을 나는 발견하였다.(Life of Morrison, Vol.I.p408. L.p414-415)


2) 언어공부하며, 교육 출판 분주한 중에도 거리 복음전도-전도문서 배포


    밀른(Milne)은 1814년 말라카에 도착하면서 즉시 전도에 나섰다. 그는 언어공부, 번역, 출판, 교육 등 분주한 중에도 전도자의 기본 사명은 복음 증거, 복음 전파이며 성서반포라 믿었다. 주일에는 Dutch Church의 적은 개신교 회중에게 설교하였으며, 주중에도 광동인(Cantonese), 북경인(Mandarin) 등 중국인들만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행인들에게도 거리에 서서 전도하였다.

    신약성서와 쪽 복음, 전도책자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나눠 주었다. 때로는 가가호호, 상점을 전도 다녔고, 배와 선원들에게도 방문하여 문서를 전달하며 전도하였다.(B.p24)

 

  
▲ 말라카출판-전도문서들

 

또한 밀른은 중국인 사원인 “쳉훈텡”(Cheng Hoon Teng, 靑雲亭)에 가서도 전도하였다. 즉,


 “제단 앞에 앉아서 복음전도 하였다. 우상의 어리석음을 정죄하고 그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향단의 컵과 주전자들, 촛대와 촛불 등 우상숭배의 제단을 뒤 엎어 버리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1816년 페낭을 방문하여 서도 ‘관인사원’(Kwen-Yin)에 가서도 수많은 중국인들을 만나 보았다. 나는 제단에 서서 그들에게 전도하였고 전도문서를 배포하였다”고 그의 일기에 썼다.(Milne's Journal,1816-1817, LMS,  S.China, Retrospect, p164. B.p24)
 

  
▲ 밀른의 전도설교 한-말라카의 쳉훈텡 Temple과 페낭의 Kwan-Yin Temple

 

밀른의 전도에 대한 열정을 1815년 8월 5일, 그의 기록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선교 첫해에 규칙적인 예배가 주간에도, 주일에도 드려 매일 아침 중국인 직원들, 일꾼들, 교사들과 함께 예배드렸고, 신약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읽고 기도로 마쳤다. Dutch Church는 오전10시에 주일 예배를 인도했으며, 오후1시에 중국성경 읽고 강해하였다. 3시 반, 교사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고, 5시 거리로 나가 1시간 정도 이교도들에게 전도지 나눠주었다. 8시, 성경 읽고 기도로 예배를 마치였다. 참석자의 수는 항상 적으나 때로는 1명, 2명, 4명, 20명이기도 했다. 평균 장년 참가자가 3명, 5명, 8명이다.”(Life of Milne, pp200f. H.p432)


3) 밀른의 중국인 첫 세례인, 첫 안수 받은 목회자, 량아화(Leang A-Fa, 梁發)

 

  

▲ 중국인 첫 전도인-Leang A-Fa(梁發) / 말라카; 인쇄 출판 모습


   밀른이 량아화(Leang A-Fa, 梁發)에 첫 세례 줄때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 전도와 개종에 얼마나 박해가 심하였는가도 알 수 있다. 량아화(Leang A-Fa)는 첫 세례인일 뿐 아니라 중국인 첫 안수 받은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광동 사람으로 독신이며 33세 이다. 아버지나 형 외에 친척이 없고 쉬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검소한 생활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광동에서 1815년 4월부터 말라카로 와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Treatise on the Life of Christ' 인쇄를 제의키도 했다.”


   “A-Fa는 말라카 온지 4년 만에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 그는 우상숭배로 차있는 것 보았고 그들의 구원과 개종에 대해 갈망케 되었다. 이를 위해 전도책자를 필요로 하였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개해야 함을 가르칠 성경과 문서들을 200권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경찰들이 그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체포하여 투옥시켰고, 인쇄목판들을 파괴 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가 감옥에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모리슨이 듣고, 즉시 본토인 상인들을 통해 정부 관리와 연결하여 석방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대나무로 30대의 태형을 맞았다. A Fa는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으며, 그들은 그를 때린 후 70달러의 벌금을 받고 놓아 주었다.”

   “이러한 투옥과 태형은 그를 더욱 겸손케 하였고 그리스도로 인한 것으로 더욱 헌신케 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40일 동안 그의 고향에서 가족방문 하였다. 그는 아내의 영혼구원에 관심을 두었고, 그녀를 인도하려고 정성을 다했으며, 성경을 읽어 주었고 함께 기도하였다. 결국 그녀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A-Fa는 이때부터 우리는 마음이 하나 되었으니, 우상숭배를 버리고 진리의 하나님, 우주의 통치자시요 섭리자이시며 오직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었다고 말했다. 는 고향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 전했으며, 아내와 함께 다시 말라카로 돌아와서 밀른의 형제로 영접 받았다. 그는 새로운 자세로 일하였고 특히 성경공부 하였다.“


   A-Fa 는 밀른이 세상 떠난 후 모리슨과 함께 복음증거 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2-3년 더 공부하여 전도인 자격증을 받았다.(Qualification for an Evangelist). 모리슨은 그가 “진리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할 수 있도록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 주소서” 간청하며 고백했다고 증언했다.(B.p436)


4) 간지스 강 넘어 선교회(UGM)의 선교사들-떠돌이 순회선교에 힘써


  Ultra-Ganges Mission 선교사들도 순회전도에 힘썼다. 톰린(Tomlim)과 험프레이(Humphreys)는 말라카 해안을 따라 중국 주석광산 지역을 찾아다니며 순회 전도하였고(B.p89), 내지 정글 까지도 방문하여 링기(Linggi)강 상류를 따라 말레이 마을에 가서 함께 숙박하며 순회전도하기도 했다.(B.p91). 매드허스트는 E렝가누(Trengganu) 해안을 따라 북부지역 까지 순회전도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전도문서를 가지고 배포하며 전도하였다.


  Ultra-Ganges Mission은 Batavia(Jakarta), Singapore, Penang 까지 전도활동 지역을 넓히고 선교지부(Branch)를 설립하여, 교육사역, 문서사역, 인쇄출판사역, 중국인 뿐만아니라 말레이, 인도계 학교와 교회를 세우며 전도활동 하였다.(Ultra-Ganges Misssion 선교사 사역 분야 및 기간 표 참조)

 
5) 말라카(마육갑) 출판 전도문서 목록-아시아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UGM-말라카 출판 전도문서 목록>
求世者言行眞史記. "Life of Christ." 71 leaves. Canton, 1814.
進小門走窄路解論. "Tract on the Strait Gate." 10 leaves. Malacca, 1816.
崇真實棄假謊略說. "Tract on the Sin of Lying, and the Importance of Truth." 5 leaves. Malacca, 1816.
幼學淺解問答. "A Catechism for Youth." 37 leaves. Malacca, 1817.
祈禱眞法注解. "Exposition of the Lord's Prayer." 41 leaves. Malacca, 1818.
諸國異神論. "Tract on Idolatry." 7 leaves. Malacca, 1818.
生意公平聚益法. on Justice Between Man and Man." 10 leaves. Malacca, 1818.
聖書節註十二訓. "Twelves Short Sermons." 12 leaves. Malacca, 1818.
賭博明論略講. "The Evils of Gambling." 13 leaves. Malacca, 1819.
張遠兩友相論. "Dialogues Between Chang and Yuan." 20 leaves. Malacca, 1819.
古今聖史記集. "Sacred History." 71 leaves. Malacca, 1819.
受災學義論說. "Duty of Men in Times of Public Calamity." 13 leaves. Malacca, 1819.
三寶仁會論. "Three Benevolent Societies." 32 leaves. Malacca, 1821.
全地萬國紀略. "Sketch of the World." 30 leaves. Malacca, 1822.
鄉訓五十二則. "Twelves Village Sermons." 70 leaves. Malacca, 1824.
上帝聖教公會門. "The Gate of God's Church." 30 leaves. Malacca.
靈魂篇大全. "Treatise on the Soul." 183 leaves. Malacca, 1824.
聖書節解. "Commentary on Ephesians." 104 leaves. Malacca, 1825.
神天聖書. "The Holy Bible." Malacca, 1824.
察世俗每月統記傳. "Chinese Monthly Magazine." 7 Volumes, 524 leaves. Malacca, 1815-1821.

 

2. Ultra-Ganges Mission의 갈등문제


  1) 선교의 근본 목적 문제


   선교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본국 선교회와 교회, 선교사 동료로부터 서로간의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이일어 난다. 교육이냐? 전도냐?, 출판이냐? 복음전도냐?, 중국선교냐? 다인종 현지 선교냐? 등이다.


   모리슨이 동인도회사에 서기와 중국어 번역관으로 취직했을 때 선교사 본분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쉽게 평가 받기도 했다. 학교 보다 전도를, 문서보다 직접 사람을 만나 대화하며 전도해야 할 것이라 했다. 유능한 청년들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반 서민들 속에 들어가 복음 전해야 한다는 견해 차이를 가졌다. 중국문서, 말레이문서 등을 수집하고 저들의 문화와 관습, 생활을 연구하는 것 보다 복음을 들고 정글로 산업현장으로 어디든지 찾아가서 함께 지내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해와 견해 차이에서 갈등이 발생 한다.


   모리슨과 밀른의 인쇄출판 사역과 교육선교에 대한 비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대응하는 모습을 다음 글에서 볼 수 있다.

   일부 인사들은 문서선교를 비판키도 했다. 그리스도는 전도(Preach)하라고 보냈지 책쓰라고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모리슨은 문서선교가 효과적인 실제적 선교 활동이란 확신을 가지고 반박하였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학교설립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하라”고 파송했지, 학교 세우라고 파송한 것이 아니다“란 점이다. 이에 대해서도 모리슨은 Preach"란 영어단어에 6가지 다른 Greek가 있다고 지적하며 예수님도 가르치셨고,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 가서 Teach하라고 한 사실을 중시하여 반박하였다.(H.p117) 예수님도 선교 방법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쓰셨으며 12제자를 모아 보내기 전 가르치셨다고 주장하였다.


   밀른은 말라카에서 학교를 개교했을 때, 부모의 동의 없이 “어떻게 기독교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아 난처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밀른은 점진적으로 학생들에게 기독교 교리문답 등을 가르치고 예배에 참석 시켜 교육을 통한 선교를 이루어 나갔다.


   학교선교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논의는 그 목적과 관계가 있다. 선교회와 교회들은 학생들을 개종시키고 교인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그러나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며 복음을 받아들여 그들의 가정에 까지 전도하는 것이었다. 교육선교의 결과는 미미한 것 같아도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에서 선교사들은 서구교육의 개척자이며 모든 인종의 자녀들에게 학교를 개방하여 기독교를 가르쳤고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2) 좌정선교사냐? 떠돌이 순회전도 선교사냐?(Sedentary Missionary? or Itinerant Preacher, Missionary?)


     선교 초기 때부터 선교사 목적 수행에 제기된 갈등 문제이다. 밀른과 신임 선교사들 시이에 일어난 문제로 책상에 앉아 있는 정적인 “좌정 선교사”인가?(Sedentarys), “순회 전도 선교사”인가?(Itinerant)의 갈등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학문이나 지적으로 접근하는 정적인 이들과 순회전도로 대중성과 직접선교를 주장하는 “떠돌이 선교사”(Wandering Missionary)인가의 관점의 차이이다. 모리슨(Morrison)은 학자(Scholar-Missionary)이다. 그러나 밀른(Milne) 역시 동일한 유형의 선교사이나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순회전도, 노방전도, 가르치며 전도하고 출판하여 문서로 전도하였다. 콜리어(Collie)와 키드(Kidd)도 “좌정선비 선교사”(Sedentary Scholar Missionary) 유형이다.


    그러나 매드허스트(Medhurst)는 개성이 강하고, 개별적인 길가는 선교사 이였다. 험푸레이(Humphreys), 휴거스(Hughes), 톰린(Tomlim) 선교사들과 대부분의 말라카 선교사들은 떠돌이 순회전도자들이였다. 사람들에게 가서 직접 복음을 전하고 활동하는데 헌신하는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특히 중국인들 중에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기지(基地) 보다, 대중에게 들어가서 건물 세우고 전도하는데 관심을 두었고, 중요한 것은 개인 접촉과 만남으로 여기며, 인쇄된 말씀 보다 구두로 전달되어야 한다(Verbal Communication)고 주장하였다.


    또한 언어공부 보다 평범한 서민들과 직접 개별적인 대회를 통해 전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지역 현지 언어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만다린(Mandarin,북경어) 보다 혹키엔(Hokkien,福建語)으로, 더 보편화된 현지 지역인의 언어를 사용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야곱 톰린”(Jacob Tomlin)이 영화학당(Anglo-Chinese College)에서 혹키엔(Hokkien,福建語)을 공부하고 사용했는데 이점이 모리슨의 비판을 받은 점이다. “톰린(Tomlin)은 어슬렁거리며 나다니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평하였다.


  문제는 순회전도 유형의 선교사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점이다. 페낭에서 싱가폴로, 씨암(태국)으로 바타비아(자카르타)로 발리로 자바로 북부해안 까지 여행 다니나 성실하게 한 곳에서 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도 “책상에 앉아 있는 샌님 선교사“라고 비난하지만 저들이 번역하고 발행한 성경과 전도문서를 가지고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슨은 한 선교사가 인쇄하고, 학교운영하고, 설교와 전도하고, 대학교수도하고 선교 지휘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 공동선을 위해 협력(Co-operation)하여 분담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모리슨은 “불쌍하게도 밀른이 죽은 후 나는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음에서 울어나는 충실한 동반자를 가지지 못했다”고 애탄하며, 특별 위원회에 넘겼다.(1834.1). 모리슨은 1834년 8월 1일 광동에서 별세하였다.(B.p100)


3. Ultra-Ganges Mission의 폐쇄와 홍콩 이전


1) 모리슨의 싱가폴과 스템포드 경의 이전계획-Singapore Plan-Morrison과 Stamford Raffles의 계획


    밀른은 모리슨과 충실한 협력, 동반자로 학당(College)건축을 추진할 때에도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말라카에서 1819-1820년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그의 부인 레이첼(Rachel Cowie)도 1819년3월20일에 별세 했고, 1821년에는 심한 고통, 두통, 위 등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밀른은 쉬지 않고 일하였고, 1822년 1월에는 학당(college)에 새로운 지학강좌(地學講座)를 신설키도 했다.


    밀른은 순회전도로 1822년 2월 20일 말라카를 출발하여 싱가폴, 4월2일에는 말레이시아 서해안으로 말라카 거쳐 페낭(Penang) 까지 항해하였다. 4월 11일 페낭에 도착 했을 때, 그는 완전히 병자였다. 페낭의 의사는 병이 심각하다고 진단했고 간장병이라 했다.


    그러나 밀른은 오래 동안 항해에 피곤할 것일 뿐이라 생각했다. 5월 24일 말라카에 도착하였고, 6월2일 주일 오전 2시에 별세하였다. 같은날 오후 4시 그의 시신은 영화학당(Anglo-Chinese College)으로 옮겨졌고, 성 바울 언덕(St. Poul‘ Hill), 성안토니(St Anthony)의 Dutch Cementery에 안장하였다. 모리슨은 그의 친구요 동료의 죽음 소식 듣고 “그는 잛은 생애에 많은 일을 했다”고 애통해 했다.(B.p66) 말라카의 Dutch Church(현, Christ Church)의 밀른 기념석판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말라카-Wm Milne의 기념비/ 그의 아내 Mrs Rachel Milne과 자녀들의 묘지

 

“Mr Milne은 런던선교회 중국 개신교선교사로써 Anglo-Chinese College 학장을 지내셨고, 중국인과 말레이 청년 교육 감독관으로 일하셨다. 그는 그들의 언어로 유익한 책과 전도문서를 편집하였고, 기독교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한 교역자로써 이 교회에서도 목회일 하시고 무엇보다도 최초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모리슨목사와 협력(Co-operation)하여 일하셨다. 그는 1785년 Aberdeenshire, Kennethmont에서 출생하여 1812년 선교사로써 영국을 떠나 1822년 6월 2일 말라카에서 37새로 별세하셨다.”(B.p66)


  밀른의 죽음으로 그의 Chinese Magazine와 Indo-Chinese Gleaner 발행이 중지 되었고, 모리슨은 밀른 없는 College의 미래를 염려하였다.


    여기에서 모리슨은 새로운 College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립케 되었고, 1823년 1월 싱가폴 방문 때 Stamford Raffles경으로 부터 말라카의 College와 같은 Malayan College학교설립 계획을 들었다. 모리슨은 Raffles경의 학당이전 설립계획을 선교회에 보고 하였고, Anglo-Chinese College에서 Malayan College로 싱가폴로 이전 계획이 수립 되었다.


    Raffles경은 모리슨에게 말라카의 학당(College)을 싱가폴로 이전 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Malay와 Chinese를 동등하게 학문적 균형을 이루는 Malayan College로 통합하자는 제의인 것이다.


    이는 말라카가  Dutch정부 관활 하에 있었으니, 이젠 영국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인 싱가폴(Singapore)로 옮길 것을 제의한 것이다. 모리슨은 심사숙고 하는 중 말라카 College와 선교사회 사이 관계성 문제로 포기 하였다.


    모리슨은 1823년 2월4일 싱가폴에서 말라카를 방문하여 학교를 둘러 보면서 더욱 애착심을 가졌다. 신임선교사인 Humphrey, Collie, Huttman 선교사가 학교를 맡아 운영하는 것을 보았으나, 중국어에 대해 무지한 것 보고 열심히 언어를 익힐 것을 권면도 하였다. 모리슨은 밀른의 편지와 글들을 모아 해안 맞은 편에 “밀른 기념관”을 만들고 밀른을 기념하는 비석을 히브리어와 중국어로 새우도록 했다.


   래프레스(Raffles)경은 다시 모리슨에게 싱가폴로 이전 계획을 제의하며, 싱가폴에 학교 부지를 제공하며 Chinese, Siam, Malayan Archipelago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으로 촉구하였다. 교육기관은 3구조로 나뉘는데 Malayan College와 Chinese College(말라카에서 이전해 옴), 과학 College설립 안이다.(B.p74). 모리슨과 Raffles, Colonel Farquhar 3자가 싱가폴 공관에 모여 합의하고 1823년 6월 5일 Raffles은 Singapore Institution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래나 래푸레스 경의 새 계획안은 이루지 못했다. 신임 싱가폴 총독이 거절하였고, 말라카는 영국 동인도회사 관활 지역으로 전환되었으며(1824년3월), 1826년에 래푸레스(Raffles)도 영국에서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2) James Legge의 Hongkong 이전과 Ultra-Ganges Mission의 페쇄


    제임스 레기(James Legge)가 Evans 학장의 별세로 1840년 1월 말라카에 부임하여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대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 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이 1841년 영국에 홍콩을 양도키로 하였으며, 상해(上海)를 개방하여 영국해군도 항해할 수 있게 되었고, 1842년 남경 조약으로 5개항을 개항하고 홍콩은 영국 영토로 할당토록 조약체결 하였다.


   레기는 중국선교가 중국 본토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했고, 중국의 문이 열렸으니 홍콩으로 이전할 것을 제의하고 강력히 추진하였다. 레기는 1842년 3월에 선교회에 서신을 보내 홍콩 이전을 제의하였고, 선교회에서도 학교 문 닫기로 결정하였다.


   Legge는 1843년 4월 28일 College를 2,120스페인 달러로 매각하고 Evans가 마련한 2채의 집을 포함해 3,650달러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1826-27년 건축한 Mission Chapel은 말라카 교인들이 사용토록 남겨 두었다. malay와 영어 인쇄기는 처분하고, Chinese Press와 도사관은 홍콩으로 이전 시켰다. 레게는 이러한 결정으로 말라카를 떠날 때 기뻐하였다. 1843년 8월 10일 홍콩에 7명의 선교사와 힘께 도착하여 런던선교회의 중국선교부를 설치하고 총회를 열었다. 이 총회에서  Anglo-Chinese College란 명칭을 닫고 The Theological Seminary of London Missionary Society Mission China로 변경키로 하였다. 이로써 Ultra-Ganges Mission은 1843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홍콩으로 옮긴 영화학당은 지금의 홍콩대학으로 발전하였고, 밀른과 모리슨 등 선교사들이 수집한 초기 자료와 문헌은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런던대학으로 옮겨졌다.


4.  맺 는 말


  1) 동남아시아에 남긴 Ultra-Ganges Mission 배경문제- 식민정책(Colonialism)과 결탁


      European Colonialism과 기독교 선교가 일체되었다는 점이다. 부라이언 해리슨은 “말라카 선교사들의 특성과 동기를 Europeanization의 세계진출과 이어져 있다“고 지적하였다.(B.p145). 유럽선교사들은 Westernization과 Christianization이 연결 되어 유럽과학과 이성의 승리가 기독교의 승리로 보았고(B.p148), 식민주의, 제국주의 운동을 혼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무역(Commercial)과 결탁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 정책인 상업주의에 편승했다는 점이다. 해리슨은 선교사들이 성경을 무기선과 마약과 함께 가지고 왔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B.p161)


  서구주의(Europeanism)와 결탁

   유럽인들의 우월의식(Superiority)으로 아시아를 다루고 있는 점이다.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것 같아도 유럽인들의 우월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구인들의 우월감, 서구문명 전달이 곧 기독교 전파로 여겼다는 점이다.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들과 비슷한 유형으로 기독교와 함께 서구과학, 수학, 의학, 기술을 전해 줬듯이 모리슨과 밀른도 중국을 접근하는 방식이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계몽주의, 합리주의, 정복주의 사상으로 중국을 “무지와 미신”(Ignorance and Superstition)에서 구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B.p157)


   브라이언 해리슨은 왜 기독교는 중국에서 외래종교인 불교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는가? 묻고 이는 서구 제국주의, 상업주의, 우월의식 가지고 복음과 함께 왔기 때문에 반(反) 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고 지적하였다.(B.p161)

   이러한 지적은 21세기 새로운 세기에 한국선교사가 극복하고 아시아 선교를 감당해야할 방향이 된다.


2) Ultra-Ganges Mission의 Networking


  첫째 선임 선교사 중심으로 상호 협력 체계를 스스로 세워 나갔다. 모리슨과 밀른이 긴밀한 협력과 Network를 형성해 나갔다. 이들은 서로 권위를 내세우는 관계도 아니요, 업적을 내세우는 관계도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소신 것 광동과 말라카에서 모든 일을 협력하였고 분담하여 하나의 일을 이루기도 했다. 중국어 교사 소개 및 인쇄공을 보내고 받으며 협력하여 중국어 번역의 대 사명을 이루어 냈다.


   둘째 Ultra-Ganges Mission 은 선교사 자치 선교회로써 모든 문제를 함께 협의하며 뜻을 모아 나갔다. 당시 선교본부와의 연락은 6개월 걸리므로 긴박한 선교지의 문제를 신속히 다루지 못함으로 선교사들이 개별화 되고 독립적이 되는 일을 막고 협력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점은 오늘날 한국선교사들과 선교단체 등에서 기억해야할 중요점이기도 하다.


   세째 Ultra-Gangese Mission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전문분야 가지고 협력해 나갔다. 성서번역, 교육선교로, 인쇄기술 있는 이로 문서선교사역, 말레이사역, 여성선교사역, 순회전도 사역 등을 자기 분야를 가지고 협력 선교해 나갔다.


   네째 Ultra-Ganges Mission은 선교목적을 분명히 하여 이를 위한 효과적인 협력을 모색하였다. 중국선교를 목적으로 성경번역을 중요 목표로 하였다. 또한 중국인 전도인 양성과 유럽중국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선교 현지를 중심으로 말레이 선교, 언어, 인종별 선교, 지역에서도 바타비아(자카르타), 싱가폴, 페낭에 지부를 두어 선교를 확장 시켜 나갔다.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현지인과 혼인한 자손들인 중국계 “뻐라나깐”(Peranakan)들의  교회를 설립하여,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 교회를 이루게 하였고, 인도인 뻐라나깐의 “체띠”(Chetti) 공동체를 이루고, 타밀교회를 세워, 아시아기독교,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말라카의 중국계 뻐라나깐은 “바바뇬냐”(Baba Nyonya)라 칭한다.


말라카는 동남아 “뻐라나깐”((Peranakan)의 뿌리이며, 페낭, 싱가폴 등으로 확산 번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바바뇬냐“는 독특한 복합문화를 이루어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 말라카-Chetti 마을방문-축제 때 사용하는“말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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