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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사역 이야기

2회)-UGM의 복합선교센타 설립과 협력사역

제2회

말라카; UGM의 복합선교센타 설립과 협력사역 이야기


중국과 동남아 복음전도의 선교 전초기지로 설립
 다인종 다언어 학교 및 대학 설립하여 선교사 양성 착수
선교지는 넓고 깊은 이해요구, 선교사들 신중히 접근해야
전도문서 출판사역, 아시아 기독교 형성에 영향주어


노 종 해(CM리서치)

 


▲ 밀른이 들어 온 오늘의 말라카 강

 


1. 윌리암 밀른의 선교 여행과 UG미션 설립


  1) 밀른의 선교사 헌신 결단


  
▲ 말라카-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밀른은 1785년 에버딘(Aberdeenshire) 출생으로 부친이 6세 때 별세하여 목동으로 일하며 성장하였다. 청년시절 에버딘 북서부 40마일 거리의 작은 도시 헌트리(Huntly) 회중교회에서 활동적인 신앙인 이였다. 16세 때 신앙체험하고 신앙서적을 탐독 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할 것을 생각하던 중 코위목사(Rev G. Cowie)의 설교를 듣고 전도자의 길 가기로 결심하였다.(H.p67) 20세 때 선교사로 결심하고 5년 후 1810년, 런던선교회에서 승인하여 모리슨이 훈련 받았던 고스포트(Gosport)에서 모리슨과 같은 선교훈련을 받았다.


    밀른은 1810년7월에 안수 받고 다음달 8월에 런던선교회 이사 코위 목사(Rev G. Cowie)의 딸, 라첼 코위(Miss Rachel Cowie)양과 결혼한 후 1812년 9월 4일, 선교지 중국으로 출항하였다. 밀른은 모리시어스(Mauritius)에서 승객 기다리는 오랜 동안 중국어 문자와 독서하는 기회로 삼았다.


  2) 선교사로 출발-말라카의 첫 인상


    1813년 6월 15일 영국을 떠난 지 9개월 만에 그의 생애를 보낼 역사적인 도시 말라카에 잠시 정박하였다. 말라카는 1786년 페낭에 이어 1795년부터 1818년 까지 영국 동인도회사가 관할한 지역이다. 밀른이 선상에서 본 말라카의 첫 인상은 국제 무역항 분위기였고, 맑고 조용하며 매력적인 도시라 했다. 중앙언덕에 교회가 있고, 산뜻한 색상의 가옥들, 해안의 나누 그늘, 말레이 마을의 전원 풍경, 야자나무 숲, 푸른 벌판이 “영국 시골 마을과 같은 도시”라 기록했다.(Milne to Directors, 16 June 1813, LMS, B.p12)


    36시간의 짧은 말라카 방문을 통해 ‘국제도시(Cosmopolitan Town) 모습 보았고, 중국사원들, 말레이 모스크(회교사원)들, 중국학교들,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 비누도 없이 중국인 이발소에서 2인치 반이나 되는 긴 칼로 면도하는 모습 등을 관심 있게 보았다.(B.p12)


  3) 말라카에서 마카오로-선교동역자 모리슨의 환영


   1813년 7월4일, 밀른 부부가 마카오에 도착 할 때 모리슨은 기쁨아 벅찬 가슴으로 그들을 영접했고 그 의집으로 안내하였다.

   모리슨의 일기에서 당시 심정을 살필 수 있다.


   “3시경 아내와 나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만찬 석상에 앉았다. 우리는 밀른이 도착 했다는 소식 듣고 흥분했다. 기쁨과 소망,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기록하여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6년 동안 기다리던 사역의 동역자가 우리의 본토에서 지금 이 땅에 실제로 발을 내 디디다니 나를 너무도 기쁘게 만들었다. 사랑스런 나의 동반자로 함께 헌신하여 수고하며 기다리고 바라면서 기도하던 나의 메리(Mary)도 밀른의 도착으로 기쁨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를 환영하고, 거주가 승인되며, 영접하는 일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하다. 원치 않는 일들로 인해 큰 두려움이 있기도 하다.”(1813년 7월 4일. 모리슨일기, L.p412)


  4) 첫 시련에 직면하여 동남아 선교로


     기쁨은 잠깐, 예상한 일이 닥쳐왔다. 포투칼 관리와 종교담당관들이 마카오에서 10일 안에 떠나라고 밀른에 명령하였다.(B.p13). 결국 밀른은 7월 20일 광동으로 떠나야 했다. 모리슨도 수주 후 뒤 따라 가서 앞으로 선교 계획에 대하여 숙의 하였다. 모리슨은 밀른이 4개월 동안 광동에 머물면서 중국어 공부 전념하도록  도와주었다.


    밀른이 마카오 정착이 불가능함으로  모리슨은 밀른에게 이미 기대고 있던 동남아시아  아시안안 선교(Southeast Asian Mission)에 대한 계획을 내놓고 협의하였다. 이미 모리슨은 7월7일 일기에 “그의 마지막 대책은 자바(Java)나 말라카(Malacca)로 가는 것이다”고 썼다.(B.p13). 밀른은 모리슨의 제의를 심사숙고한 후 11월에 Java, Batavia, Penang, Malacca를 선교 여행키로 수락하였다.


   밀른은 1814년 2월 4일 광동에서 자바로 가는 배를 타고 선교지 조사 위해 출항하였다. 그의 여행목적은 최근 모리슨이 1814년 1월, 번역한 중국어 신약성서와 전도문서를 배포하는 것이며 중국어 인쇄가 용이한 지역, 중국인 사역자를 양성할 수 있는 곳, 중국인들에게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중국이 개방되지 않아 선교부 자리와 거주지를 찾는 것이다.”(B.p14) 밀른은 중국어 교사이며 인쇄공인 호예체(Ho-Ye-Che) 선생을 동반하여 갔다.


  5) 동남아의 중국인들을 눈여겨보아


   밀른은 동남아시아 이주민 중국인들을 만날 좋은 기회로 여겼다. 먼저 슈마트라 남동해안의 Bangka섬 중국광부들을 찾아보았다. 영국관리 코트소령(Major M.H.Court)은 슈마트라 Palembang과 Banka섬에는 중국인이 4,50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1814년 3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Batavia, 현,Jakarta)에 도착하여 8월 까지 5개월간 머물면서 중국 정착인들의 생활을 살펴보았다.


    총독 대리 래프릴(Stamford Raffles)경의 특별한 배려로 바타비아 시외 Buitenzorg(Bogor) 그의 별장에 초대 받아 말레이(Malay)와 인도네시아인에 대한 정보를 받았으며, 래프릴 경은 밀른이 자유롭게 동부와 중부 Java, madura섬을 여행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었다. 밀른은 자신의 관심의 중심은 중국인이지만 자바사람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을 “좋은 천성에 문화인”이라고 평하였다.(B.p16). 자바에 대한 그의 인상은 식물학자, 광물학자, 고고학, 언어학, 역사가, 선교사들 각 분야의 거대한 영역이다“고 했다.(B.p16)


  6) 18C, 국제무역 중심지 말라카에 선교기지로

 

  
▲ 18c 번잡한 국제무역 항인 말라카


    밀른의 다음 여행은 말라카와 페낭이다. 1814년 8월 11일, 자바에서 1주일 항해하여 말라카에 도착하였고 소령 위리암 화쿠아(Major, William Farquhar) 공관에 묵었다. 영국을 떠나 선교지로 가면서 잠시 들렸던 곳으로 중국인 선교 기지(Chinese Mission Base) 가능성을 생각했던 곳이다.


    말라카를 지세히 살피는 동안 중국인 정착지와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임을  알았고 동남아시아의 고도로 Malay, Portuquese, Dutch, English Regimes등 국제적인 다문화 다인종의 도시이며, 중국상인들도 호켄(Fukian)으로 중국남부 지방에서 온 이들이 항상 북적대는 무역 중심지인 것을 파악하였다. 말레이안 주석, 인디안 Textiles, 미얀마 Timber, 태국 쌀, 인도네시안 후추, 중국 실크 등등이 거래 되고 있음을 조사하였다. “중국 상인 가족들은 검소하고 냉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해안 거리와 강가를 따라 굳게 문을 닫아걸고 살고 있었다. 상거래만이 그들을 더 좋은 삶을 이루게 하는 소망이다”고 평하였다.(B.p17)


   말라카는 인구가 약 17,000명이며 그중 중국인이 9천-1만명이며, 농촌지역 까지 약 20,000명으로 추산 된다고 파악하였다. 밀른은 선교 기지로 훌륭한 곳으로 여겼다. 교통통신의 이점이 있고, 지역 전반에 중국인 공동체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말라카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상업분야 만이 아니라 문화적 전통에서도 우대(prestige) 받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들면서 “중국인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더 지성적으로 보여 이들 중 배움이 없는 이들이 적다”고 관찰하였다.(B.p17)


   페낭(Penang) 여행은 유쾌하지 못하였다. 무더운 날씨로 고생하였고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동남아시아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나는 중국 그 자체에 나의 마음이 묶여 있음을 느꼈다”고 하였다. 또한 모리슨과 긴밀한 협력(Close Union)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페낭에 더 이상 지체 없이 중국으로 되돌아가기를 생각하였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새로운 선교 사역지에 대해 열정이 가슴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8월19일 말라카를 출발해 9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밀른은 7개월 동안 수천 마일을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폴트칼 관리의 말은 여전히 “마카오에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었다.(B.p18).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밀른의 여행지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권리를 가지고 지배한 지역이며, 영국 관리의 영접과 공관에서 묶었고, 그 보호 아래 관찰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인을 중심으로 조사하였지만 동시에 동남아시아 각 인종에 대한 관심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2. 말라카 Ultra-Ganges Mission의 설립
 
  Ultra-Ganges란 인도와 중국 사이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는 동남아시아란 지명을 사용치 않던 때이며, 영국이 알고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인도와 중국 정도임으로 그 사이의 지역, 인종들을 “갠지스를 넘은 지역”이란 뜻으로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1) 말라카는 중국선교의 최선지역-성서번역, 학교설립, 문서선교 등 계획


  

▲ Ultra-Ganges Mission의 복합선교본부 기지


   이상에서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중국내에 선교사가 거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인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에서 선교사역할 수밖에 없다는 최선책으로 말라카를 선교기지로 결정하고 Ultra-Ganges Mission 선교부를 두어 성서번역, 인쇄 출판사역, 문서전도 사역, 교육사역을 추진키로 하였다. 또한 동남 아시아인들에 대한 선교도 추진하여 말레이 무슬림, 인도 힌두교인들 선교도 착수 하였고, 말라카 중국인들이 국제 결혼한 분들임을 후에 알고 교육사업에 더욱 힘을 썼다.


     말라카의 학교는 현지 사역자, 전도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유럽인들이 본국에서가 아니라 선교 현지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선교 훈련 받아야 더 효괴적이라 여겨 말라카의 학교는 선교사 훈련학교 기능을 감당하였다. 실제로 선교사로 파송 받으면 말라카의 학교에 등록하여 자신의 시역분야의 중국어, 말레이어등 언어를 교육 받았다.


  2) 말라카: 중국과 동남아 선교의 기지로 계획수립


   모리슨은 Ultra-Ganges Mission을 조직해 가능한 한 중국 인근에서 중국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감당하여 중국선교의 성공적 사역 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그들은 중국에 복음의 문이 열릴 것을 확신하였다. 이에 말라카로 결정하고 밀른을 1815년에 정착 시켜, 말라카에 선교본부(The Headquarters of Mission)를 두고 Batavia, Penang, Singapore에 지부 설립키로 하였다.(L.p429)


    해리슨은 “Ultra-Ganges Mission은 개신교 선교에 대한 중국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를 위한 기지(Base)로 India와 China 사이에 있는 지역에 선교사 본부(Missionary Headquarters)를 두려는 계획이다. 특히 선교사 훈련 센터(a training Centre for specificully missionary puporse) 뿐 아니라 총체적으로 지역을 위해 고등교육센타로 계획하고 있다”(B.p19)고 했다.


   모리슨은 이러한 계획을 1812년 12월 런던선교회장에게 보고하였다.


    “나는 Ganges넘어 모든 나라들(all the countries)을 위해 말라카에 선교사, 유럽인들과 현지인 교육 기관 설립을 바라고 있다. 우리의 아시아적 선교(Asiatic Missions)를 위한 중심이 되길 원하며,  우리는  조직화된 협력(organized co-operation)과 선교사들의 위원회(a committee of missionaries)를 원한다”고 기록하였다.(Morrison to Directors, 22 Dec.1812, LMS. & Morrison Memoir, I, P352. B.p19).


  3) 모리슨과 밀른의 긴밀한 협력 결단-말라카에 선교복합기지 설립키로


    모리슨은 이러한 훈련센타가 말라카에 있는 것이 영국에 있는 것 보다 더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리슨은 “복음의 결정적인 승리는 현지인 선교사들과 성경을 통해서 이다”(the final triumphs of the Gospel will be by means of native missionaries and Bible). 밀른도 이에 동의하여 “결정적 승리”(the final triumph)를 성취하는 것이 환상 일 수 없다고하면서, “우리는 중국인들을 복음화 시킴이 이 시대에 이룰 줄 확신 한다”(We are fully persuaded that the evangelizing of the Chinese will be a work of ages)고 했고, “우리는 현지 중국인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seminary for native missionaries)가 가장 효과적인 사역 수단이라 여긴다” 했다.(Milne to Directors, 16 Jan.1814, LMS, S.China.  B.p20)


   모리슨과 밀른에서 분명한 것은 단순한 교육 기관 설립이 아니라 순수한 선교사 양성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리슨과 밀른은 말라카에 중국 선교부 설치함을 자체적으로 결정했다.


    이들은 선교부 지역으로 자바와 말라카를 놓고 검토하였다. 자바 중국인 정착지가 있고 중국과 빈번한 무역선이 드나들어 해상 교통(Sea-Communication)의 이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말라카는 도시의 특성이 있다는 점,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중국 본토는 물론 동남아시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 더 넓고 더 다양한 항구 도시로써 교통(Communication)이 가능한 곳이며, 더욱이 ‘조용한 곳“(a quiet place)이란 점에서 Batavia보다 더 유익한곳이라 판단하였다.(milne, Retrospect, pp 135-36, B.p20)


   모리슨과 밀른 두 선교사는 말라카를 최종 선택 동의하였고 1815년1월 밀른이 말라카로 가서 선교부를 개설토록 결정하였다. 밀른은 말라카로 가서 선교사 양성사역, 중국어와 말레이어, 영어 문서 출판사역을 추진 키로 하고, 모리슨은 선교회에 “말라카는 현지인(native)과 유럽인들을 양성할 당신의 선교사학교(Missionary College) 장소이다”고 신학교(Training College) 사역을 재촉하였다.(Morrison to Rev G.Bunker, 11 Jan.1815. morrison의 일기21 Jan.1815. Morrison to directors 2 march 1815, LMS, S.China. B.p21)


   밀른은 중국을 떠나 새로운 동남아시아로 향하면서 “하나님께서 중국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실 때까지” 말라카 선교(Malacca Mission) 계획을 수립하였다. 초등학교 교육(Elementary Education), 신앙 교육기관(Religious Instruction), 중국인쇄소와 출판사(printing and Publishing in Chinese), 인도와 중국 사이의 모든 지역을 선교지로 삼는 “Ultra-Ganges Mission" 본부로 말라카에 설립한다는 것이다.(B.p21-22)


   밀른은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1815년 3월초 마카오를 출발 하여 의사도 없는 곳 말라카에 5월 21일에 언어교사요 중국인 인쇄공과 함께 말라카에 도착하였다. 밀른은 말라카에서 기독교 선교사로써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전도자의 길을 떠난 것이다. Ultra-Ganges Mission에 대해 답변이 없던 런던선교회에서 1815년 2월 중국인들 뿐 아니라, 말레이(Malay)인들에게 사역하기 위해 말라카로 선교사를 파송키로 했다는 답신을 보내 왔다.(B.p20)  Ultra-Ganges Mission은 초기에 Extra-Ganges Mission으로도 알려졌다.(J.p92)


 3. 교육과 문서선교착수-영화학당(Anglo-Chinese College) 설립


  1) 교육선교 사역-다인종 다언어 학교설립


     밀른이 말라카에 도착하여 그의 주택 마당 작은 집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먼저 세웠다. 1815년 8월 5일 개교할 때는 5명이 입학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늘어났다. 중국인 교사가 혹키엔(Hokkien,복건어)어로  읽기, 쓰기와 산수를 가르치는 소년학교(Boy's School)를 시작하였다. 1816년에는 광동어(Cantonese-Speaking) 학교를 설립하여 곧 8개교로 확장되었고, 모리슨의 교리문답과 기독교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H.p73)


  
▲ 다인종 다언어의 학교설립-중국어 영화학당

 

  밀른은 말라카에 국제 결혼한 중국인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중국에서 이주한 청년들이 동남아시아 여러 인종과 결혼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레이, 태국인, 미얀마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여성등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고 특히 말레이(Malay)피가 썩인 중국인을 바바,뇨냐(Baba Nyonya)로, 인도인들은 체띠(Chetti"라 칭한다. 이들의 "뻐라나깐 공동체"(Peranakan Community)가 있음도 알았다. 이들은 중궁인 문화 전통을 지니고 있지만 말레이(Malay) 전통과 언어습관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을 위한 말레이 학교도 세웠다.(B.p25)


     밀른은 중국어를 익히며 말레이인 압둘라(Abdullah bin Abdul kadir)를 언어교사로 말레이어"(Bahasa Malay)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밀른의 선교목표는 중국인 이지만 "말레이인들과 말레이어 문서 출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5년 9월에는 런던선교회에서 말레이 선교를 위해 새로운 선교사 톰슨(C.H.Thomsen)을 파송해주어 본격적으로 말레이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다.

    톰슨도 압들라에게 말레이어를 배우며, 1816년에 말레이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나 그와 아내가 9월에 중한 병으로 인해 귀국하였고, 그의 아내는 귀국도중 별세하여 바다에 수장하였다. 말레이 학교는 톰슨 부재 기간 동안 밀른이 압둘라와 함께 이어 갔으며, 톰슨이 건강을 회복하고 1817년 말에 다시 말라카로 부임하여 활발케 되었다.(B.p26).


     말레이 사역에 대해 밀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말레이어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다. 말레이 서적 읽기가 즐겁고 현지인(Native)의 도움을 받아 훨씬 수월함을 느낀다. 또한 간단한 문장은 쓸 수 있으면서, 말레이어가 훌륭한 언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철자법이 확정되어 있지 않아 표준어도 없고, 문법 표기법도 서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말레이 문서 구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으며 복사 등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톰슨선교사는 말레이 서적을 수집하였다. 나는 내가 수집한 문헌자료들로 선교도서관(Mission Library)을 세울 계획이다.... 내가 이젠 중국인 선교위해 헌신치 않는다고 비난 받고 있음도 알고 있다.”(Milne to Directors, 22 June 1817. LMS, B.p27)


   중국인 학교는 언어별로 설립 되었는데, 말라카에는 혹키엔(Hokkien,복건성) 중국인들이 많으므로 인쇄 출판 사역을 위해 혹게인 학교를 세웠다.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선교사가 1817년 6월에 파송받아 말라카에 도착하여 인쇄사역과 함께 특별히 혹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가르쳐, 이로써 Ultra-Ganges Mission은 중국인 선교를 더욱 확장 시키게 되었다.(b.p37)


   1820년에는 12개교 학교로 증가했다. 즉, 중국인 학교 7개교(말라카 3, 페낭2, 중국1, 바타비아1)로, 그 중 5개교는 말레이와 다른 인종을 위한 학교로 페낭에 말레이학교 2개, 말라카에 1개, 말레이와 영어학교 1개, 말라바(Malabar인도계학교 1개교이다. 말라카의 학교는 공식 지원 없이 선교사들이 운영하였고 학생수는 약 300명이라고 했다.(H.p118).


   1822년, 톰슨(Thomson)은  싱가폴에 첫 학교를 설립하여 서구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첫 여학교는 1842년에 개교하였고 후에 영국성공회(Anglican)에서 인수하였다. 인도계 말라바(Malabar) 학교도 설립하였고 타밀어 교재는 마드라스에서 가져 왔다.

   1827년 런던선교사회에서 첫 여성선교사 뉴월(Miss Newell) 양을 파송하여 말라카에 여자학교를 설립하였다.(H.p81). 뉴웰 양은 쿠출라프 선교사와 결혼하여 1829년 5월 사임하였고,  이어서 왈라스(Miss M.C.Wallace) 선교사가 담당하였다.


   2) 말라카 Anglo-Chinese College 설립-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에 “말라카에 복음 전도인 양성을 위한 대학(College)설립이 필요합니다”고 특별 요청하였다. 런던선교회에서는 ‘영화대학‘(The Anglo-Chinese College) 설립을 승인한다.”고 회답이 왔다. 즉 “말라카에 중국인 청년들에게 영어교육을 통해 기독교의 원리를 익히며, 중국문서와 다른 지역 언어도 가르쳐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The Anglo-Chinese College 신축을 승인한다.”고 회답이 왔다.(B.p35)


    그러나 밀른의 건강이 심각해졌고, 광동의 의사는 밀른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리슨은 “만일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중국 선교를 위한 말라카 선교부는 어떻게 될지 나는 모른다. 후계자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했다.(B.p36). 그러나 밀른은 병과 싸우며 계속 추진해 나갔다.


   밀른은 다소 건강이 회복되어 1817년 가을 부터는 중국 광동을 방문해 모리슨과 선교사역을 협의하며, 교육선교의 종착지인 Anglo-Chinese College 설립을 추진하였다. 1818년2월 밀른은 말라카로 돌아왔고, 9월에는 3명의 신임 선교사가 도착하여 합류하였다. Samuel Milton 과 John Ince는 중국인 분야 사역위해 언어공부 시작하였고, Thomas Beight는 말레이 분야 사역위해 언어공부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초 언어 공부를 마치고, 싱가폴과 페낭의 Ultra-Ganges Mission 지부로 나갔다. 모리슨은 광동에서 언어교사로 3명을 더 파송하여 Anglo-Chinese College설립을 돕도록 하였다. 밀른은 영국 공관장 화쿠아 소령(Major, Farquhar)을 만나 9월16일 네데란드 관리에게 College설립을 위한 대지 매입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쾌히 승낙해 받았다.(B.p40)


   모리슨과 밀른은 Anglo-Chinese College 종합계획서를 1818년 10월 날짜로 발표하였다. 종합계획 내용은 전체 구조와 조직 행정체계와 교직원 그리고 교과과정들이다. 학교의 실제적인 목적은 중국인들에 복음을 전할 중국 기독교 선교사 군단을 일으키는 것이라 했다.( a Corps Chinese Christian missionaries to the Chinese People)


   종합계획에서 밝힌 것은 첫째로, College를 Academy학교로 성장 시킬 것이며, 중국과 유럽 학문을 상호 연마시켜 중국어와 문학을 유럽에 전달하고, 둘째는 Ultra-Ganges에 유럽문학과 과학을 습득케 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다. Ultra-Ganges에 속한 나라들을 중국, Cochin-china, Loo-Choo, Corea, Japan, Eastern Archipelago Chinese Colonies이라 했다. 셋째로, 유용한 학교 시설을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즉 중국도서관, 직원 및 학생 기숙사 등 건축하고, 영어와 중국어 인쇄 출판 시설을 갖춘다는 것이다. 넷째는 입학자격으로 유럽과 미국인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분이어야 하며, 유럽대학 유학생이나 기독교 선교사, 상업 회사원들과 국가 공무원들이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현지 청년(Native Youth)들로 기독교회나 개인적으로 자급이나 후원이 가능한 이라 했다. 마지막 다섯째는 College 조직과 운영을 밝힌 후 말라카의 밀른, 중국의 모리슨(Malacca-Milne, China-Morrison)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이 종합계획서는 1818년 10월 278일 런던선교회 회계 한케이(W.A.Hankey)에게 서신으로 동봉해 보냈다.


  3) 영화대학 기공식- 넓고 깊이 있는 이해가 선교를 촉진 시켜


    Anglo-Chinese College 기공식을 1818년 11월 11일 말라카에서 거행되었다. 기공식에는 말라카 영국 총독인 하쿠아(William Farquhar), 신임 네델란드 공관원(Governor), 네델란드 군대 지휘관과 수많은 지역 인사들이 참석하였고, 머릿돌에는 라틴어로 “Collegium Anglo-sinicum, sub auspicio et impensa Roberi Morrison S.T.D. Fundatoris, 1818."이라 새겼고, 설립자로 모리슨의 이름이 기록 되어 있었다.(The Anglo-Chinese College, Under the auspices and at the expense of Robert Morrison, D.D., the Founder, 1818.).(ㅠ.p43).


   밀른은 기공식사를 통해 새로운 교육기관의 근본목적을 강조 했고 중국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중국은 학문과 철학적 사상의 깊이가 있는 나라이므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영국과의 관계는 상업적 관계를 중시하여 정치적 이해의 방편이 되나 중국의 법, 사상, 관습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언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문화적, 상업적, 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중국과 그 민족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임”을 강조하면서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College 관심에 포함되어 있음을 밝혔다.


     “Ultra-Ganges India의 다른 나라들과 언어도 매우 중요하다. 이 나라들의 법, 관습, 문자, 종교들도 연구과제로 중요하다. 말레이(Malay)어는 오래동안 Dutch에의해 연구되었으나 영국은 늦게 연구되고 있다. 다양한 연구와 유용한 서적들이 실례와 함께 인쇄출판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다. Sumatra, Javanese언어, Cambodia와 Siam어 등은 개신교 국가에 다루지도 못하고 있다.”고 밀른은 피력했다.


    그러나 밀른은 “무엇보다도 중국연구가 우선이라고 하면서 이들 지역에서 중국연구가 실제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지역이 중국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B.p43-44)


   머리돌 어디에도 런던선교회의 이름은 없었다. 1816년 밀른에게 학당(College) 건축을 원칙적으로 승인했고, 모리슨에게 유럽인과 중국 선교사 및 교사를 양성하도록 승인했으나 아직 학당건립계획“(College Plan)을 승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대학, 학당 장소는 말라카-뜨렝쿠에라 관문 해안


  
▲ 오늘날 Tengkera 관문거리의 모스크

    대학, 학당(College) 장소는 이미 1816년에 획득한 선교관(Mission House) 뒷편, 말라카 도시 서쪽에 위치하였고, 트랜쿠에라 관문(Tranquerah Gate) 밖, 해안에서 200피트 지점으로 Tranquerah Gate에서 ”단종클링 윌자“(Tanjong Kling wlja) 해안도로로 말라카 강뚝 오른편에 있다고 위치를 설명하였다.(B.p54)


    이 학당건물은 1820년 9월 8일에 완성되었는데 당시 아름다운 건물로 “말라카의 최고 건물“이라 했다. 총 건축비는 7,500 스페인 달러이다. 이 건물은 단순한 학당 건물이 아니라 선교센타로 복합건물이다. 1층에는 도서실이 있어 중국어, 말레이어, 시암(태국)어 등 아시안 서적들이 3,380권과 중국서적 2,850권이 소장되어 있는 최초 아시아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중국어 출판 인쇄공은  량아화(Leang Ah Far)로 1815년에 광동에서 말라카로 왔으며, 선교사를 충실히 도우 일하였다. 영어인쇄 소장은 톰스(P.P.Toms)이었다. 톰스는 1814년 동인도회사 광동에서 온 이로 모리슨의 중국어 자전(Chinese Dictionary)를 출판 감독한 분이기도 하다.


    1817년에는 매르허스트가 인쇄소를 맡았다. 1819년 인쇄물을 보면 4,3000권의 중국성경, 12,000권의 중국어 잡지, 22,000권의 말레이 전도책자, 3,000권의 영어 책자라 하여 활발한 분서사역을 짐작할 수 있다. 매르허스트는 학교교재로 지도(地圖)가 있는 책을 출판키도 했다.
 
  5) 전도 소책자와 문서출판 배포사역


   성서번역과 출판 배포 사역과 함께 기독교 전도 책자를 번역 저작 출판하여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면 밀른의 “Two Friends"란 저서는 중국어로 ”張袁兩友相論“이라 출판 되었고, 이 책은 한국에서도 마펫(S.A.Moffett) 선교사에 의해 ”쟝원량우샹론“(경셩졍동예수교회당간인,1893)으로 1893년에 출판 되어 한국 초기 교회에게 큰 영향을 준 책 이다. 이러한 문서들은 순회전도에서 배포 되었고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 되었다.


   문서선교는 선교사가 갈 수 없는 곳에도 갈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훈련학교인 고스포트(Gosport) 강의에서 보그박사(Dr.Bogue)는 선교사 임무 중 문서 출판을 추천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교사가 없는 곳에서도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했고, ”언변으로 보다는 저술로 전파하는 것이 더 발전된 것“이라 했다.(H.p115)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은 문서선교 사역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밀른 자신도 신앙문서회(Religious Tract Society) 사역이 선교사회와 성서공회와 함께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매드허스트는 밀른이 세상 떠난 후 그의 문서사역을 정리하였다. 즉 1810년부터 1836년 까지 인쇄 츨판 선교한 일- 말라카와 광동에서 서적 및 전도문서 450,469권, 바타비아(Batavia, 자카르타)에서 191,394권, 페낭에서 43,900권, 싱가폴에서 66,000권이며, 중국어 성경전서 2,075권, 신약 9,970권 쪽 복음 31,000권이라 정리하였다.(H.p115).


    그러나  밀른과 모리슨은 "말레이(Malay) 전도"에 있어서는 문서선교가 효과적이 아니라 여겼다. 이는 말레이들 대부분 문맹(文盲)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1835년 기록에 보면 중국인 남자 9/10은 독서 할 수 있으나 중국인 여성은 1/10  밖에 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인쇄 출판 사역은 선교의 도구 일뿐 아니라 상업적이기도 했다. 인쇄소를 통한 수입으로 학교와 선교사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다. 정부문서도 맡아 일했고 유럽 상인들을 위해서도 인쇄했다.(H.p126) -<계속-밀른의 복음전도 활동>

 

  
▲ 밀른의 설교하였던 “Christ Church Melaka"-최초 중국어성경번역 기념비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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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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