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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이야기

결혼50년을 맞으며, 그의 나라와 의를!

[결혼50년을 맞으며, 그의 나라와 의를!]

노종해(CM리서치)

 

*결혼예식(1971.5.15.토). 신학대학 3년 때-장소:금호교회(현, 두모갓교회)

올해(2021년)로 나는 결혼50주년을 맞는다. 신학대학 3년 첫 학기에 결혼하였다.(1971.5.15.)

이북에서 피난 온 아버님은 이남에 아무 친척도 없으셨다. 그러니 교회목회로 나가기 전, 며느리와 함께 살아야 가족이 된다는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군복무도 졸업 후 목사안수 받고, 군종장교로 가게 되있기 때문이다.(학생 때  군종장교 시험에 패스했다.)

 

이미 1학년 2학기부터 사귀는 여성이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버님은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다고, 혼인을 서두르신 것이다. 마땅히 거절할 이유 없어, 약혼식하고(2.15.), 결혼예식을 한 것이다.(5.15.)

 

결혼식 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이날도 학교수업에 참여했고, 담임교수였던 변선환 교수님은, 교수님들에게 "노종해 군이 결혼식하는 날에도 학교에 왔다"고 소개하였다. 그래도 결혼식이 다가 올 수록 긴장이 되어, 수업도 않되고 하여, 마지막 수업을 조퇴하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동기들의 결혼 축가

결혼식 직전에 도착하여 허둥지둥 계단을 오르내리며 준비하다가 다리를 삐끗 다치기도 했다. 결국 신랑입장 때 똑바로 걷기 힘들었던, 그 때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결혼식에는 동급생들과 신학생들로 가득 찾고, 반주와 축가 등도 모두 동급생, 친구들이 맡았다. 나는 어떻게 결혼식을 치루었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

교수님들은 결혼선물로, "축 결혼 교수일동, 식기 1세트"를 보내 주셨다. 후에 "대학예비고사" 패스한 첫 신학생의 결혼식에 교수일동으로 선물 받기는 내가 처음임도 알았다.

결혼식  주례는 최영기 목사님(금호감리교회, 현 두모갓교회)이었고, 강단 뒤에는 동기들이, "ooo도령, ooo아씨"라 장난스럽게 써 붙혔다.

 

*신부는 하얀 한복으로, 웨딩드레스 대신

우리는 신부 예복을 하얀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결혼식하였다. 한번입는데 낭비할 필요 없다고 뜻을 같이 했기때문이다.

 

*전국대학 교련경연대회, 감신대 참가단!-거의 전교생이었다.
*감신대 퇴수회-선 후배와 한 자리에!

신학교 졸업 전, 전도사로  교회목회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아버님의 주장처럼, 부모님, 형제자매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목사안수(1974) 후, 군종장교훈련-광주 보병학교(1975. 6.)이 때 2아들도 있었다.
*군목시절, 약정복을 입고!(군목임관, 1975.8.)

충주제일교회 목회(72~75)에서 부터, 육군군목(75~78), 서울 돈암제일교회(78~82), 온양온천교회(82~85), 서울 정동제일교회(86~88), 말레이시아 선교사(88~2019)로 이어져, 성역 47년으로 정년은퇴 하였다.

 

*말레이시아 선교사, 세렘반에서
*말레이시아 선교사(1988~2019.4.)-친 난민사역복장!

일본 선교사 파송은 1985년4월4일이었으나, 일본 법무성에서 입국비자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온양온천교회를 사임하고(1985.12.31), 선교사로 나가길 기다리며 준비하는 동안  , 잠시 정동제일교회에서 교회역서와 선교담하며(86), "담임목사 권한 대행"하고(87), 선교지를 변경하여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떠났다.(1988.8.)

 

*정글 원주민(오랑 아슬리)가옥에서(1989)

이후 정년은퇴할 때까지 선교사로 열대의 나라에서 32년을 해외에서 보냈다. 결국 아들 3형제도 국내에 떨어트려 놓고, 부모님도 모시지 못한 32년을 해외에서 지낸 것이다.

 

*릴리안 최 선생!-UNHCR보증, 난민학교 사역!
*정글 비닐천막, 난민교회!-주일예배,후 난민 음식봉사!

아내의 고달픔과 안타까움을 보듬지도 돌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아들들은 제 엄마와만 통화, 교류, 의논하고 있다. 나는 아들들에게 할 말도 없다. "잘있냐?, 잘해라!", 그 말 이외엔 할 말도 없다. 아들 3형제가 어떻게 자란줄도 모르고 있다.

 

*한국에 두고 온 아들 3형제들이 쿠알라룸푸르 선교센타에서의 만남!(1989년)
*국내에서 자취한던 아들 3형제와 상봉기념!(1992년 경)

아들 3형제는 대학, 대학원도 졸업하고, 2명의 박사, 1명의 MBA이며, 모두 대학졸업과 동시에 취직하여,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기까지 모든 일은 아내가 맡아 돌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일만했지, 자녀들도 모르고, 서먹서먹하고, 이제와서야 사귈래니 그것도 어색한 편이다. 나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아내의 칠순때, 가족들과 함께!(2019.2.)

나는 교회와 선교사역에 전념하였고, 집안 일은 아내에게 모두 맡겼다. 나는 "바깥사람"이고, 아내는 집안주인"이었다. 이젠 은퇴하여 바깥일이 없어졌으니, "집안주인"만 보인다. 이젠 아내의 텃밭일도 격일로 주3일 함께하며, 자연과 함께 지내기로 작정했다.

 

*선교사 30년만에, 자녀들과 한 식탁에!(2019.2.)

어느덧 결혼 50년에, 아들 3형제는 장성하여, 50세, 48세, 42세가 되었고 며느리도 3명이다. 큰 손녀는 대학 4년 손자도 고3, 작은 손녀는 중2이다.

 

*정년은퇴식장에서, 장남도 함께!(2019.4.)

나는 결혼 50년을 앞두고,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을까?" 고심하며 조사하고 뜻을 정하였다. "기독교 식 한국 전통혼례"는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내, 릴리안 최선생의 사역-이슬람 대학에서, 한국음식문화 특강!

결혼40년 기념 때에는 "카나다선교대회"에 참여하여, 씨에틀~벤쿠퍼~록키산을 넘어~밴푸~갈가리~토론토~옥빌~뉴욕을 거쳐서 선교여행하였다. 아내는 청소년시절부터 소원이라던 눈덮힌 록키산 정상에 올라 한 없이 기뻐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에서, 은퇴 전 막내아들 집을 방문하여!(2018)

아내는 늘 웨딩드레스를 동경했고, 결혼40년 기념 때 뉴욕을 여행했을 때, 자매들이 깜짝 이벤트로 "어게인 결혼식"을  모두 드레스를  입고 준비하였다. 나는 이 때도 어색하여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웨딩드레스 대신, 전통 한복으로 어게인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역으로 집합제한, 이동제한이 되었으니, 어게인도, 여행도 내년(2022년)으로 미루고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혼50년을 자축하여 집 근처 충주호 전경이 펼쳐는 남한강 가에서,  징거미 민물생선요리를 특식으로 점심을 나누고, 호암 호숫가 카페에서 따듯한 차 한 잔과 축하케익을 나누었다.

나는 목회와 선교사역에 전념,  몰두한데에는 후회가 없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선교현장에서 30년 이상 사역하고 있는, "시니어 선교사님"들과 함께!(2018.12.)

목회 초년부터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란 말씀을 가슴에 두고 헌신한 삶이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란 말씀과 "그대로 의를 행하고, 그대로 거룩하라"(계22:11)란 말씀을 되색이었다.

 

*충주 호암 호숫가의 장미가 활짝 웃고 있어요!(2021.5.15.)

호숫가에는 따듯한 빗방울을 머금고, 장미가 아름답게 활짝 펼쳤다!

결혼50년을 맞으며, 부르시는 그 날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살며, "CM리서치"와 "자연과 함께" 등, 사명감당하리라. 찬송부르며 다짐하였다.

"아름다운 장미 예수 내 주여
나의 마음에 향기 가득 하소서

나의 일생 어느 곳을가든지
주의 사랑으로 향기 내리다.

예수 나의 주여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rch:2021.5.15.)

 

*아내의 텃밭일과 함께하며, "자연과 함께!"
*축 결혼50년!-며느리 일동(2021.5.15.)-축하 화환 좌우 옆에는, 3며느리들과 가족 사진!
*남한강 가에서 특식을!(2021.5.15.)
*결혼50년 특식:징거미 메기탕+장어+송어회-충주 남한강 가에서!
*충주 호암 호숫가, 베이커리에서!(2021.5.15.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