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해(CM리서치)

(KL:2025. 1. 3. 금, 11:00 am):KL한인교회 목회사역은 2천 년도에 내려놓고, 원주민과 현지인 선교에 전념하였다.
동남아 선교센터도 KL도심 잘란 아루(Jalan Aru)와 갈림 길인 잘란 장캇 부킷빈땅(Jalan Changkat Bukit Bintang)으로 옮기고 도시선교에 착수하였다.
KL도심에는 동남아는 물론 중동 각지에서 무슬림들이 전쟁 등을 피하여 이주하였고, 주로 KL도심에 거주하였으며, 도심은 각국 무슬림이 진출하여 영어공부 유학 등 사업과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슬람, 무슬림선교를 농촌이나 정글보다 도시선교가 주요하다고 여겼다. 도심에 "동남아 이슬람 선교센터"를 세우고, 공식명칭으로는 그냥 "동남아 선교센터"라 칭하였다. "이슬람" 선교라 함은 민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13년 동안 이슬람 선교센터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아예 도심으로 이전한 것이다.

나는 정년은퇴 후 7년 만에 도심의 선교센터로 사용하던 옛 장소를 찾아보았다. KL도심 부깃빙땅(Bukit Bintang, BB) 거리는 번화한 거리, 빌딩숲으로 변천해 있었다.

숭아이 왕(Sungai Wang) 쇼핑센터 몰은 당시만 해도 도심중심에 붐비던 쇼핑센터였는데, 그 모습이 사라졌다.
숭아이 왕 몰은 헐리고 신축 건물을 짓고 있어 담장을 둘러놓고 있었으며 부깃빙땅 전철역으로 가려졌다.

숭아이 왕 정문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장캇 부깃빈땅 길 2층에 선교센터가 있었다. 옆길로는 유명한 먹자 거리로 잘란 아루(Jalan Aru)가 있다.

잘란 아루 모퉁이 낡은 건물에 2층에 선교센터가 있었다. 길가에서 바라보니 호텔 표시판이 있고 주변은 마사지 등 상점으로 변해 있었다.

당시 선교센터에는 인터내셔널 교회로 주일마다 언어를 달리하는 성도들이 모이던 국제교회였다. 교파를 불문하고 예배와 집회시간을 달리하여 사용된 교회공간이었다.

한국에서 단기선교사들이 1년 혹은 2년 등 머물며 선교협력 사역하던 곳이다. 동남아 이슬람 선교센터는 무슬림들의 집회뿐만 아니라 결혼식 등 친교와 교류에 활용 개방했던 곳이다.



쿠알라룸푸르 도심에는 이슬람 권에서 이주 방문해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많았다. 이들을 돌보며 사귀고 친교 교류, 섬기고 봉사 안내하는 선교센터였다.

동남아 선교센타에서는 이슬람 대학 호텔경영학과 한국 음식 실습 강의와 동남아 이슬람 동향을 조사하며 연구 저서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선교센터 사무실에는 자료들의 서가가 있었고, 동남아 이슬람 동향을 살피고 조사연구하는 선교센터였다.

현재 선교센터의 이슬람 서적 등 자료들은 감리교 신학대학(MTU)에 기증하였다.
특히 동남아 선교센터에서 난민선교가 시작되었고(2000년), 2003년부터는 선교센터에서 난민종족 예배를 드려, 난민교회를 자립개척하도록 준비하게 하였다.


난민 종족 언어로 찬송가를 수만 권 발행하여 배포하였고, 정글 난민종족을 은밀히 접근하여, 정글 예배 및 성찬예식, 성경공부, 음식봉사 섬김을 추진하던 곳이다.

릴리안 최선교사는 당시 난민학교 교육선교를 전담하였고 UNHCR에서 난민교사증도 받아 신분을 보장 받기도하였다..

난민학교 연합도 이루어 교사교육과 미국,영국, 호주, 프랑스 등 국제학교들과 친선 교류 협력하여 특별활동도 하였다.

정글 난민들이 현 행정수도인 뿌뜨라지야(Putrajaya)를 건설 노동자로 인근 정글 산속에 비닐천막 치고 거주하고 있음도 알고 정글을 찾아갔었다.
정글 난민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주택을 임대 거주할 수도 없었다. 저들은 정글산속에 비닐천막 교회를 세우고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경찰들이 불시 검거에 나서면 도피하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비닐교회를 걷어가면 이동하여 또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동남아 선교센터는 정글 산속 비닐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인도하며 돕고 정글 봉사를 이어 갔다. 단기 협력선교사들도 동행하여 봉사 선교사역에 헌신하였다.
동남아 선교센터를 바라보니, 그때 그 열정이 끓어오른다!

난민학교도 선교센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도심에는 곳곳에 난민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도심 식당, 거리식당, 상점 등에서 일하는 난민들이 많았다.

난민학교는 KL도심 7개교 연합(CSO)을 이루고 교육과정을 공동협력하였으며, 바이블 캠프와 학년말 콘서트를 협력 개최하기도 하였다. 공연장은 국제학교들에서 협력하여 주었다.


이러한 난민학교 연합과 바이블 캠프, 콘세트 등을 동남아 선교센타에서 주선하였다.

도심난민들은 조그만 방하나에 20여 명씩 칼잠을 자며 숙식하전 곳이다. 어린아이들도 맘 놓고 율지 못하고, 어린아이들도 숨죽여 숨어 지내던 모습이 지금도 애잔하다. 이러한 난민들을 돌보며 섬기는 선교센터였다.

선교센터 자리를 바라보니 그때 그 열정이 끓어올라 가슴을 달구어 벅차올랐다. 지금은 도시 변두리로 흩어져 곳곳에 난민학교와 교회들이 활동하고 있다.

잘란 임비에 있던 UNHCR의 난민센터와 난민학교도 폐쇄 이전하였고, 지금은 높고 화려한 빌딩 숲으로 변천해 있다.
나는 동남아 선교센터를 감회 젖어 둘러보고 잘란 아루의 거리식당도 둘러보았다.

어둠이 깔리는 밤에는 불빛을 밝히고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웃음과 소란으로
붐비는 먹자 거이지만, 오전시간에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잘란 아루에는 BB전철역이 생기고 고층건물들이 자랑하지만, 뒷골목에는 음식쓰레기들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기는 여전하다.

이번 방문에서 한인 선교사들을 한식당 궁정에서 만남을 가졌을 때 난민선교를 모두 추진하고 있었으며 곳곳에 난민 교회와 난민학교들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난민선교가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하였다.
요즘 폭우가 쏟아져 지방도시 곳곳에 물난리가 났으며 수재민도 수십만 명이라는데, 오늘도 잘란 아루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부깃빙땅 대로로 나와 교차로를 건너서 이세탄 쇼핑몰 빌딩으로 들어갔다. 비를 피하고 화렌하이트 빌딩의 스타벅 커피숍에 자리를 접고 옛 선교센터 자리 방문기를 포스팅했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쏟아지는 부깃빙땅 거리를 걸었고, GOKL버스를 타고 KLCC에 도착하였다.

나는 부깃빙땅 선교센터에서 스트록(뇌졸중)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었고 언어장애로 말도 어눌하였다.

시련과 고뇌, 좌절과 우울증 등 투병의 시간을 보내며, 선교센터에서 KLCC공원길을 기도하며 찬송하며 걸었었다.
정년은퇴 후 KLCC인근에 거하며 KLCC공원 길을 걸으니 그때 그 은혜의 시절이 가슴 저리게 생각이 난다.

선교사 34년 중 말레이시아 선교사 32년 동안 고난과 은혜의 추억에 한 없는 감동, 감격, 감사가 넘처나고 있다!
내 마음속에는 "선교에 실패는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돼 색이고 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역사해 주심, 감사합니다!
34년 선교사로 정년은퇴 후 7년 만에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하여 추억을 더듬으며 은혜의 현장을 찾아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찬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리포터 노종해:2025. 1. 3. 금.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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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학교 연합 청소년 바이블 캠프, 정소:임비채플]





[난민학교 연합 콘서트-장소:호주 국제학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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